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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낙태권 폐기에, 존슨·트뤼도·마크롱 일제히 비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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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오늘은 매우 영광스러운 날이다.”(자코베드 토레스, 대법원 판결 지지자)

“대법원에도, 이 나라에도 슬픈 날이다.”(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25일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낙태 반대론자들이 ‘내 세대의 3분의 1이 낙태로 살해됐다’며 팻말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25일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낙태 반대론자들이 ‘내 세대의 3분의 1이 낙태로 살해됐다’며 팻말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미국 연방대법원이 지난 24일(현지시간) 낙태를 헌법적 권리로 인정했던 1973년의 ‘로 대 웨이드’ 판례를 49년 만에 5대4으로 뒤집으면서 미국 사회가 이처럼 찬반으로 분열되고, 자유주의 성향의 서방 각국 지도자들도 비판에 나섰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이날 르완다 키갈리에서 열린 영연방 정상회의 기자회견에서 “이번 결정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나는 이를 큰 퇴보로 생각한다”고 말했다고 25일 BBC와 일간 가디언, 블룸버그통신 등이 보도했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도 “미국에서 전해진 뉴스는 끔찍하다”면서 “정부나 정치인, 또는 남성이 여성에게 그들의 몸과 관련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말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낙태는 모든 여성의 기본 권리로 반드시 보호돼야 한다”며 “미 연방대법원에 의해 자유가 도전받은 모든 여성에게 연대를 표시한다”고 말했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미국의 상황은 성 평등을 향한 긴 여정을 떠올리게 한다”며 “독일은 물론 세계의 많은 곳에서 권리가 위협받는 여성들을 지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낙태는 의료행위”“내 몸이고, 내 선택”

CNN은 “미국은 G7(주요 7개국)과 다른 동맹국에서 낙태법의 본산 역할을 해왔지만 이번 판결로 이 사안에서 다른 동맹국과 멀리 떨어지게 됐다”고 지적했다. 미 인권단체인 생식권리센터(CRR)에 따르면 G7 회원국 중 미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낙태를 사실상 허용하고 있으며, 임신 기간이나 배우자 동의 등 세부 조건만 있다.

여성 지도자들의 비판은 더욱 날카로웠다. 저신다 아던 뉴질랜드 총리는 25일 성명을 내고 “자신들의 신체에 관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여성들의 기본권을 앗아가는 것을 보면서 믿을 수 없을 만큼 당혹스러웠다”고 말했다. 칠레의 첫 여성 대통령을 지낸 미첼 바첼레트 유엔 인권 최고대표도 “여성 인권과 성 평등에 큰 타격”이라며 “지난 25년간 전 세계 50여 개국이 낙태 관련 규정을 완화했는데, 미국은 이런 흐름에서 멀어졌다”고 지적했다.

25일 찬성론자들이 워싱턴에서 ‘자궁이 총기보다 더 많이 통제된다’는 팻말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25일 찬성론자들이 워싱턴에서 ‘자궁이 총기보다 더 많이 통제된다’는 팻말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25일 미국에선 워싱턴의 연방대법원 앞에 낙태 찬성·반대론자가 모두 나와 시위를 벌였다. 찬성 시위대가 대법원을 비판하며 “내 몸이고, 내 선택”이라고 외치자 이들을 지지하는 주변 남성들이 “그들의 몸이고, 그들의 선택”이라고 추임새를 넣었다. 이들은 “낙태는 의료행위” “대법원을 낙태하라”는 구호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임명한 보수 성향 대법관들의 사진을 넣은 팻말도 들었다.

시위 현장에서 만난 애덜린 저커맨은 “여성 권리의 문제이자 인권의 문제”라며 “지금처럼 과거로 시간여행을 한 적은 없었다”고 이번 판결을 비판했다. 그는 “남성 4명과 여성 1명이 모든 여성의 권리를 결정하는 것은 시스템이 고장 났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이번 판결을 이끈 보수 성향의 대법관들을 가리킨 것이다.

“낙태는 살인”“태아는 죽음 택한 적 없어”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낙태 반대론자들도 모여 “이번 판결은 역사적인 순간이며 대법원이 옳은 일을 했다”고 말했다. 시위 현장에선 낙태 찬성론자인 ‘프로 초이스’ 그룹과 반대론자인 ‘프로 라이프’ 집단 간 설전도 벌어졌다. 찬성론자가 “낙태는 여성의 선택”이라고 주장하면 반대론자는 “낙태는 살인”이라고 응수했다. 한 지지론자가 “성폭행 임신도 아이를 낳으라는 거냐”고 따져 묻자 한 반대론자는 “내 부모는 그런 아이들을 입양해 키웠다”고 받아쳤다. 반대론자들은 “프로 초이스는 누구의 선택을 말하는 거냐. 배 속 태아는 죽음을 선택한 적이 없다”며 “낙태 금지는 생명을 지킨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앞서 24일 미 연방대법원은 5대4로 ‘로 대 웨이드’ 판례 폐기를 결정했다. 미시시피 주의 한 낙태 전문 병원이 임신 15주가 지난 태아의 낙태를 금지한 미시시피주 주법에 이의를 제기한 소송을 심리하는 과정에서 ‘로 대 웨이드’ 판례가 잘못됐다며 이같이 결정했다.

대법원이 낙태와 관련한 규정을 “선출직 대표들에게 맡겨야 한다”고 판결하면서 앞으로 각 주가 낙태의 합법·불법 여부를 결정짓게 됐다. 전체 50개 주 가운데 절반 정도가 낙태를 불법화할 것으로 보인다고 워싱턴포스트(WP) 등이 보도했다. ‘로 대 웨이드’ 판례가 폐기되면 자동으로 낙태를 불법화하는 ‘트리거 조항’이 있는 13개 주는 30일 안에 조처를 할 것으로 예상된다. 최소 8개 주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날 낙태를 불법으로 규정했다고 WP는 전했다.

낙태가 합법인 주는 20개 주와 워싱턴DC 정도다. 캘리포니아·오리건·워싱턴 등 진보 성향의 주는 낙태가 불법으로 바뀐 주에서 오는 여성들을 위한 의료 서비스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미국 주요 기업과 국무부·국방부 등 연방 부처도 직원에 대한 관련 시술 접근권을 보장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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