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성폭행 임신도 낳으라니" 뒤집힌 낙태권에 갈라진 미국

중앙일보

입력 2022.06.26 17:00

업데이트 2022.06.26 20:21

 낙태 권리를 옹호하는 지지자들이 25일(현지시간) 워싱턴DC 연방대법원 앞에서 시위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낙태 권리를 옹호하는 지지자들이 25일(현지시간) 워싱턴DC 연방대법원 앞에서 시위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오늘은 매우 영광스러운(glorious) 날이다.”(자코베드 토레스, 대법원 판결 지지자)
“대법원에도, 이 나라에도 슬픈 날이다.”(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지난 24일(현지시간) 미국 연방대법원이 낙태를 헌법적 권리로 인정한 1973년의 ‘로 대(對) 웨이드’ 판례를 뒤집으면서 미국 사회도 찬반 대결로 뒤집혔다. 지난 25일 워싱턴DC 시내 퍼스트 애비뉴에 위치한 대법원 앞에는 이번 판결을 지지하는 시민들과 반대하는 시위대가 모두 나와 구호를 외치면서 극렬히 대립했다.

대법원을 비판하는 시위대는 “내 몸이고, 내 선택(My body, my choice)”이라고 외치며 낙태 권리를 요구했다. 낙태를 옹호하는 시위대의 남성들은 “그들의 몸이고, 그들의 선택(their body, their choice)”이라고 추임새를 넣었다.

이들은 “낙태는 의료 행위(Abortion is healthcare)”, “대법원을 낙태하라(Abort SCOTUS)”고 적힌 푯말도 들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임명한 보수 성향 대법관들 사진을 넣은 푯말도 등장했다.

대법원 판결에 반발한 시위대가 25일 워싱턴DC의 대법원 앞에서 불에 탄 채 위아래가 뒤집힌 미국 국기를 흔들어 보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대법원 판결에 반발한 시위대가 25일 워싱턴DC의 대법원 앞에서 불에 탄 채 위아래가 뒤집힌 미국 국기를 흔들어 보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애덜린 저커맨(16)은 “여성 권리의 문제이자 인권의 문제”라며 “지금처럼 과거로 시간여행을 한 적은 없었다”고 대법원을 비판했다. 그는 “남성 4명과 여성 1명이 모든 여성의 권리를 결정하는 것은 시스템이 고장 났다는 것을 보여준다”고도 말했다. ‘로 대 웨이드’ 기각에 찬성한 새뮤얼 얼리토, 클래런스 토머스, 브렛 캐버노, 닐 고서치, 에이미 코니 배럿 대법관을 지칭한 것이다.

반면 대법원 판결을 지지하는 군중도 모여들었다. 이들은 “역사적인 순간” “영광스러운 날”이라며 대법원이 옳은 일을 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낙태 금지는 생명을 지킨다”고 외쳤다.

전날 대법원 다수의견이 발표된 직후 한 지지자가 “헌법은 낙태의 권리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판결문 결론을 낭독하자 지지자들은 함성을 지르고 샴페인을 터뜨리며 자축하기도 했다.

낙태 지지자들 못지않게 낙태 반대론자들도 ‘전의’를 불태웠다. 텍사스주에서 온 낙태 반대 운동가인 마크 리 딕슨은 “이제 시작이다. 50개 주 전체가 낙태를 불법화할 때까지 싸울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장에선 낙태 찬성론자인 ‘프로 초이스(pro-choice)’ 그룹과 낙태 반대론자인 ‘프로 라이프(pro-life)’ 그룹 간 설전이 벌어졌다. 낙태를 지지하는 이들이 “낙태는 여성의 선택”이라고 주장하자 반대론자는 “낙태는 살인”이라고 응수했다.

낙태 지지자가 “성폭행 임신도 아이를 낳으라는 거냐”고 따져 묻자 한 낙태 반대론자는 “내 부모는 그런 아이들을 입양해 키웠다”고 받아쳤다.

낙태 지지자들은 “프로 라이프는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만 생명 존중을 말한다. 태어난 아이들은 초등학교에서 총에 맞아 죽는다”면서 보수 진영이 낙태에 반대하곤 총기 규제엔 느슨한 태도를 지적했다.

낙태 반대론자들은 “프로 초이스는 누구의 선택을 말하는 거냐. 뱃속 태아는 죽음을 선택한 적이 없다”고 비판했다.

미국 워싱턴DC의 대법원 앞에 25일 낙태 권리를 요구하는 시위대가 모여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미국 워싱턴DC의 대법원 앞에 25일 낙태 권리를 요구하는 시위대가 모여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연방대법원은 24일 5대 4로 ‘로 대 웨이드’ 판례 폐기를 결정했다. 미시시피주의 한 낙태 전문 병원이 임신 15주가 지난 태아의 낙태를 금지한 미시시피주 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소송을 심리하는 과정에서 선례가 된 판결 ‘로 대 웨이드’가 잘못됐다며 무효로 했다.

다수 의견을 지지한 대법관 5명 외에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로 대 웨이드’를 폐기하지는 않지만, 미시시피주의 낙태 금지는 유지하는 안을 제안했다.

다수 의견서를 작성한 새뮤얼 얼리토 대법관은 ‘로 대 웨이드’ 판례는 ”처음부터 터무니없이 잘못됐다“면서 “헌법은 낙태에 대한 권리를 부여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따라서 “낙태를 규제할 수 있는 권한은 국민과 그들이 선출한 대표들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적시했다.

다수의견서에 서명한 대법관 5명 가운데 3명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임명한 보수 성향 재판관들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4년의 임기 동안 3명의 대법관을 임명함으로써 대법원의 보수화에 기여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일리노이주에서 한 연설에서 “어제 대법원은 헌법의 승리, 법치주의의 승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생명에 대한 승리를 선고했다”며 자축했다.

반면 바이든 대통령은 대법원 판결은 국민의 권리 침해라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기 위한 방법은 오는 11월 중간선거에서 공화당을 심판하는 것이라며 선거 이슈화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백악관 연설에서 “올가을 로(대 웨이드)가 투표항목에 올라 있다”면서 “사생활, 자유, 평등에 대한 권리는 모두 투표용지에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대법원이 낙태 규율을 “선출직 대표들에게 맡겨야 한다”고 판결함에 따라 앞으로 각 주가 낙태의 합법·불법 여부를 결정짓게 됐다. 전체 50개 주 가운데 절반 정도가 낙태를 불법화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워싱턴포스트(WP) 등이 전했다.

우선, ‘로 대 웨이드’ 판례가 무효가 될 경우 자동으로 낙태를 불법화하는 ‘트리거 조항’이 있는 13개 주는 30일 안에 낙태를 불법으로 규정할 것으로 예상된다. 최소 8개 주는 대법원 판결이 나온 날 낙태를 불법으로 규정했다고 WP는 전했다.

낙태가 합법인 주는 20개 주와 워싱턴DC 정도다. 캘리포니아·오리건·워싱턴 등 진보 성향 주는 낙태가 불법으로 바뀐 주에서 오는 여성들을 위한 의료 서비스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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