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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앞에서 죽어간 19세 보병"…美 참전용사 기린 '500명의 행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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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같은 열기 속에 행진했을 군인들을 생각하면 이 정도 걷기는 무척이나 수월하죠.”

 6·25 전쟁 72주년을 맞아 25일 서울 용산구 일대에서 열린 ‘리버티 워크(Liberty Walk·자유의 걸음)’에 참여한 미국인 스티브 로빈스(64)씨의 소감이다. 한국전 미 참전용사를 기리기 위해 전쟁기념관을 출발해 국립중앙박물관까지 약 4㎞를 1시간 동안 걷는 행사다. 이날 낮 기온이 30도까지 오르고 습도가 높아 후텁지근한 날씨 속에서도 주최 측 추산 약 500명이 걷기에 동참했다. 주한미군 50여명을 포함해서다. 이날 행사는 6·25 재단과 대한민국유군협회가 주관하고 부영그룹이 후원했다.

6·25전쟁 72주년인 25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리버티 워크'(Liberty Walk) 걷기 행사에서 참가자들이 전사자명비 앞을 지나고 있다. 연합뉴스

6·25전쟁 72주년인 25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리버티 워크'(Liberty Walk) 걷기 행사에서 참가자들이 전사자명비 앞을 지나고 있다. 연합뉴스

“어린 보병들의 값진 희생 정신에 감사”

 한국인 친구 심영미(53)씨와 4㎞ 걷기를 완주한 로빈스씨는 “한국전이 발발한 뒤 태어났기 때문에 나로서는 70여년 전의 전쟁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면서 “걷기를 통해 참전 용사들을 기리고 떠올리는 것은 꽤 좋은 방법 같다”고 말했다. 심씨도 “미처 피지도 못한 19살, 20살 젊은 사람들이다. 한국이 어딘지도 모르고 와서 대부분 보병으로서 맨 앞에서 그냥 죽어간 거잖나. 그 희생이 참 값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난 2019년 6월 25일 미국 맨해튼에서 열린 ‘리버티 워크(Liberty Walkㆍ자유의 걸음)’ 행사 당시 배터리 공원(The Battery) 한국전쟁 기념비 앞에서 포즈를 취한 구성열(79)ㆍ김창화(75)씨(왼쪽) 부부와 참석자들. 구씨 제공

지난 2019년 6월 25일 미국 맨해튼에서 열린 ‘리버티 워크(Liberty Walkㆍ자유의 걸음)’ 행사 당시 배터리 공원(The Battery) 한국전쟁 기념비 앞에서 포즈를 취한 구성열(79)ㆍ김창화(75)씨(왼쪽) 부부와 참석자들. 구씨 제공

미국서 1마일 당 2달러씩 기부가 시초 

 올해 한국에서 처음 열린 리버티 워크는 원래 2018년 미국에서 처음 시작됐다. 6·25 재단을 설립한 구성열(79)·김창화(75)씨 부부가 매해 6월 25일이면 1마일(1.6㎞)을 걸을 때마다 2달러(2500원)씩을 성금으로 걷었던 것이 출발이다. 부부는 2019년 6·25 재단을 설립하고 그동안 모은 성금에 사재를 보태 2020년부터 미 참전용사 고향의 초등학교에 5000달러(약 648만원)씩을 기부해왔다. 이른바 ‘리버티 프로젝트’다. 미국의 50개 주 가운데 11개 주 학교 도서관에 기부금과 참전용사의 명패를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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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날 행사엔 70~80대의 모습이 가장 많이 보였다. 6·25 당시 13살이었던 강철원(85)씨는 고향인 경북 안동에서 남쪽인 영천으로 내려가다 미군을 본 이야기를 들려줬다. 강씨는 “피난을 가는데 시냇가에 미군이 조종하는 헬리콥터가 사람하고 떨어져 있더라고. 겁이 나가지고. 그땐 미군이 많았으니까 미군이라고 직감했다”고 말했다. 미국은 6·25 전쟁에 유엔 연합군으로 참전해 3만7000여명이 전사하고 9만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7000여명은 아직도 실종 상태다. 그는 “젊은 사람들이 6·25를 상기해서 나라를 잘 지켜줬으면 좋겠다”며 “앞으로도 힘 닿을때까지 걷기 행사에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영우(73)씨는 월남전 참전용사 출신이다. 그는 1969년 해병대에 입대하자마자 바로 월남으로 파병돼 1년을 머물렀다. 이날 4㎞를 걷는 동안 월남전 참전 때가 떠올랐다는 이씨는 “모르는 나라였지만 국가에서 보내니까 갔지”라며 “사실은 내가 살기 위해서 죽기 살기로 싸웠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R.O.K. Marine Corps(대한민국 해병대)’라고 적힌 모자를 쓰고 리버티 워크에 나왔다.

6·25전쟁 72주년인 25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리버티 워크'(Liberty Walk) 걷기 행사에서 참가자들이 국립중앙박물관쪽으로 행진하고 있다. 위문희 기자

6·25전쟁 72주년인 25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열린 '리버티 워크'(Liberty Walk) 걷기 행사에서 참가자들이 국립중앙박물관쪽으로 행진하고 있다. 위문희 기자

 10·20대는 유튜브·인터넷 보고 참여

군 관련 유튜브 채널을 통해 이날 행사를 알게 됐다는 20대도 있었다. 제56기 학군사관(ROTC) 출신으로 2년 전 전역한 예비역 중위 천혁진(27)씨는 “비록 군을 떠났지만 역사적으로 미군을 포함한 한국전 당시 유엔군의 희생정신을 깊이 존경하기 때문에 이날 행사에 나왔다”고 말했다. 천씨는 젊은세대에게 6·25가 갖는 의미와 관련해 “근현대사보단 고대사와 일제강점기 위주로 역사 교육이 이뤄지는 것 같다”며 “오늘날과 가장 가까운 대한민국의 역사, 즉 6·25에 대해서도 젊은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버지와 함께 걷기에 나선 초등학교 5학년 정민호(11)군은 “동생이 오늘이 6·25라 전쟁기념관에 간다고 해서 다른 행사는 없을까 인터넷에서 검색해서 알게됐다”고 말했다. 정 군은 “많은 분들이 돌아가신 국가 유공자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온 거라고 생각한다”며 “이렇게 걷는 모습을 보고 하늘나라에 있는 유공자들이 기뻐하실 것 같아요”라는 소감을 밝혔다.

6·25전쟁 72주년인 25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을 출발해 1시간 만에 국립중앙박물관에 도착한 '리버티 워크'(Liberty Walk) 행사 참석자들. 위문희 기자

6·25전쟁 72주년인 25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을 출발해 1시간 만에 국립중앙박물관에 도착한 '리버티 워크'(Liberty Walk) 행사 참석자들. 위문희 기자

 미국 맨해튼서도 24㎞ 걷기 행사

 미국에서도 25일(현지시간) 올해로 5번째 리버티 워크 행사가 열릴 예정이다. 뉴저지주 팰리세이즈 한인타운을 출발해 뉴욕의 맨해튼 남쪽 배터리 공원까지 5시간 동안 약 15마일(24㎞)을 걷는 일정이다. 이날 한국과 미국에서 열린 행사에서 걷힌 기부금은 6·25 재단을 통해 미 참전용사 고향 초등학교에 전달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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