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돛을 올릴 수도, 노를 저을 수도 없을 때…"두려워 말라, 나다" [백성호의 예수뎐](51)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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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호의 예수뎐]

제자들은 먼저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떠났다. 예수는 뒤따라온 군중을 돌려보낸 뒤 갈릴래아(갈릴리) 호숫가의 산으로 올라갔다. 홀로 기도를 하기 위해서였다. 제자들이 탄 배는 뭍에서 멀어져갔다. 예수는 저녁때가 됐는데도 혼자 그곳에 있었다.

이스라엘의 갈릴리 호수 위로 새들이 날고 있다. 2000년 전에도 저렇게 아름다운 노을이 갈릴리 호수를 적셨을 터이다. [중앙포토]

이스라엘의 갈릴리 호수 위로 새들이 날고 있다. 2000년 전에도 저렇게 아름다운 노을이 갈릴리 호수를 적셨을 터이다. [중앙포토]

 (51)물 위를 걷는 예수…두려워 말라

예수는 왜 산에 올랐을까. 저녁 무렵뿐만 아니었다. 새벽녘에도 홀로 산에 올라가 기도를 하곤 했다. 고요한 시간, 고요한 공간을 뚫고 예수는 기도를 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마태오 복음서 6장 10절). 이것이 예수가 올렸던 기도의 골자였다. 하늘이 땅이 되는 일, 땅이 하늘이 되는 일. 그래서 둘이 하나가 되는 일. 그것이 예수의 기도였다.

갈릴래아 호숫가를 걸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노을이 파스텔처럼 호수와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이윽고 어둠이 내렸다. 멀리 나갔던 배들도 등을 켠 채 하나둘 부두로 돌아오고 있었다. 당시 제자들이 탄 배는 갈릴래아 호수 어디쯤을 가고 있었을까. 마태오 복음서에는 “배는 이미 뭍에서 여러 스타디온 떨어져 있었는데”라고 기록되어 있다.

제자들이 탄 배가 이미 호수로 떠나버리자 예수는 물 위를 걸어서 그들에게 갔다. [중앙포토]

제자들이 탄 배가 이미 호수로 떠나버리자 예수는 물 위를 걸어서 그들에게 갔다. [중앙포토]

요한 복음서에는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다.”고 나와 있다. ‘스타디온(stadion)’은 고대 그리스 때 썼던 길이의 척도로 약 185.05m다. 처음에는 185m 경주를 ‘스타디온’이라 불렀다가 나중에는 경주하는 장소를 ‘스타디움(stadium)’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니 배는 호숫가에서 적어도 수 킬로미터는 떨어진 상태였으리라.

당시 호수에는 강한 바람이 불었다. 제자들은 맞바람 때문에 애를 먹고 있었다. 파도도 거세게 일었다. 그때 멀리서 무언가가 보였다. 누군가가 호수 위를 걷고 있었다. 그 형체가 제자들을 향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제자들은 겁에 질렸다. “유령이다!”라고 소리치는 이도 있었다. 유령이 그들에게 다가와 말했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Courage! It is I. Do not fear!)”(마르코 복음서 6장 50절) 다가온 이는 예수였다. 예수가 배에 오르자 바람이 멎었다.

갈릴리 호수는 무척 넓다. 영어로는 '갈리리 호수'가 아니라 '갈릴리 바다'라고 부른다. 그만큼 호수의 규모가 크다. [중앙포토]

갈릴리 호수는 무척 넓다. 영어로는 '갈리리 호수'가 아니라 '갈릴리 바다'라고 부른다. 그만큼 호수의 규모가 크다. [중앙포토]

호숫가에 앉아 어둠이 내려앉은 갈릴래아 호수를 바라봤다. 이 일화는 우리에게 또 하나의 물음을 던진다. 예수 당시에는 돛으로 바람을 받거나 손으로 노를 저어 배를 움직였다. 그런데 맞바람이 불면 돛을 쓸 수가 없다. 게다가 어두운 밤이고 파도도 거셌으리라. 그러니 노를 저어 나아가기도 만만치 않았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제자들은 어찌할 수 없었을 터이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어찌할 수 없을 때가 있다. 돛을 올릴 수도 없고, 노를 저을 수도 없을 때. 그런데 파도마저 거세게 몰아친다. ‘인생’이라는 배는 때때로 그런 위기를 맞는다. 그 속에서 허둥대는 우리를 향해 예수는 말한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는 왜 그렇게 말했을까. 거기에 어떤 해법이 담겨 있을까. 어쨌든 결과는 놀랍다. 성경에는 ‘예수가 배에 오르자 바람이 멎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예수는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이 탄 배를 향해서 걸어갔다. 이걸 본 제자들은 깜짝 놀라서 "유령이다"라고 소리쳤다. [중앙포토]

예수는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이 탄 배를 향해서 걸어갔다. 이걸 본 제자들은 깜짝 놀라서 "유령이다"라고 소리쳤다. [중앙포토]

파도는 높이 솟구쳤다가 산산이 부서지고 결국 사라진다. 그것이 파도의 운명이다. 우리도 한 줌의 파도일 때는 모든 게 두렵다. 그렇게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를 향해 예수는 말한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는 왜 “나다(It is I)!”라고 말했을까. 물에 빠져 죽을지도 모르는 급박한 상황에서 왜 뜬금없이 “나다!”라고 했을까. 그것을 알면 맞바람과 파도를 헤쳐가는 데 어떤 도움이 될까.

파도는 늘 두렵다. 하지만 그런 파도 안에도 바다가 있다. 파도의 속성과 바다의 속성은 하나다. 파도가 그 사실을 깨우치면 달라진다. 그 순간 모든 두려움이 소멸한다. 파도가 아무리 산산이 부서져도 다시 바다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도 그런 바다가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다름 아닌 ‘신의 속성’이다.

지금도 갈릴리 호수에 거센 바람이 불면 큰 파도가 일렁인다. 그럼 고기를 잡으러 나갔던 배도 일찍 철수한다. [중앙포토]

지금도 갈릴리 호수에 거센 바람이 불면 큰 파도가 일렁인다. 그럼 고기를 잡으러 나갔던 배도 일찍 철수한다. [중앙포토]

〈52회에서 계속됩니다. 다음 주는 쉽니다.〉

짧은 생각

달마 대사는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가
선(禪)불교를 전한 인물입니다.

달마의 법맥을 이은 제자가
혜가 선사입니다.

중국 소림사 뒤에는 바위산인 씅산이 있다. 이 씅산 꼭대기에 달마가 면벽수도 했다는 동굴과 달마상이 있다. [중앙포토]

중국 소림사 뒤에는 바위산인 씅산이 있다. 이 씅산 꼭대기에 달마가 면벽수도 했다는 동굴과 달마상이 있다. [중앙포토]

하루는 한 나그네가
혜가 선사를 찾아왔습니다.
그 나그네는 한센병 환자였습니다.

당시 중국에서는
전생에 큰 죄를 지어서,
그 죄의 업보로 한센병에 걸린다고
믿었습니다.

나그네도 그랬습니다.
전생에 어떤 무지막지한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몹쓸 병에 걸렸을까 생각하며
자신의 죄를 탓하고 또 탓했습니다.

그런 죄의식이 나그네를 괴롭혔습니다.
“나는 죄인이다”라는 생각 때문에
그의 삶은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 그가 혜가 선사의 이름을 듣고
먼길을 찾아왔습니다.

나그네가 혜가 선사에게 말했습니다.

  “죄가 많아서 몹쓸 병에 걸렸습니다.
   부디 이 죄를 없애 주십시오.”

그 말을 들은 혜가 선사가 답했습니다.

  “그 죄를 내 앞에 내놓아라.
   그럼 내가 그 죄를 없애주겠다.”

그 말을 들은 나그네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도저히 어찌할 방도가 없다고 여겼던
자신의 죄를 없애주겠다고
단언하니 말입니다.

삼조 승찬대사가 14년간 머물다 서서 입적했다는 삼조사 입구. 사찰의 규모가 웅장하다. [중앙포토]

삼조 승찬대사가 14년간 머물다 서서 입적했다는 삼조사 입구. 사찰의 규모가 웅장하다. [중앙포토]

나그네는 죄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방금 전까지도
자신을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뜨린 죄를,
나그네는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죄는 손에 잡히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마침내 나그네가 말했습니다.

  “아무리 죄를 찾으려고 해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 말을 듣고 혜가 선사가 말했습니다.

“너의 죄가 이미 없어졌느니라.”

그 말끝에 나그네는 크게 깨쳤습니다.
그리고 초조 달마를 이은
이조 혜가의 법맥을 이어서
삼조 승찬 대사가 됐습니다.

저는 이 일화에서도
무한의 고요를 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말합니다.
그걸 ‘대속(代贖ㆍsubstitution)’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속죄를 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가지는 모든 죄의식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내맡길 때,
우리에게는 무한의 고요가 밀려옵니다.

그리스도교 수도(修道)의 핵심은
‘전적인 내맡김’입니다.
나의 죄만 예수님께 내맡기는 게 아닙니다.
너무 좋아서 내가 붙들고 집착하는 것도
똑같이 내맡겨야 합니다.
좋은 건 내가 갖고,
나쁜 것만 내맡기는 식이 아닙니다.

나의 에고를 뿌듯하게 만들고,
나의 에고를 더 강하게 만드는
이런저런 집착과 자만도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내던져야 합니다.
그게 ‘전적인 내맡김’입니다.

그런 내맡긴 뒤에는
어김없이 밀려옵니다.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는
‘무한의 고요’가 밀려옵니다.

그 고요 속에서
한 발, 한 발 걸어가는 삶.
우리는 그걸 ‘평화’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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