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 대사관 주소를 '우크라 자유로'로 바꾼 이 나라…'지명 전쟁'

중앙일보

입력 2022.06.25 05:00

러시아와 서방 국가 사이에 '대사관 땅 개명 전쟁'이 벌어졌다. 러시아는 자국 주재 서방 대사관 부근 지명을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지하는 명칭으로 교체했고, 서방 국가도 러시아 대사관이 있는 도로명을 '우크라이나 영웅' 등으로 바꿨다.

지난 15일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 앞 가로등에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의 군사행동을 지지하는 상징이 된 Z라는 글자가 붙어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 15일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 앞 가로등에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의 군사행동을 지지하는 상징이 된 Z라는 글자가 붙어 있다. AFP=연합뉴스

러, 美 대사관 광장 '도네츠크인민공화국 광장' 명명 

모스크바시 당국은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 바로 앞에 있는 광장 이름을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 광장'으로 명명했다고 워싱턴포스트(WP)가 22일 전했다. DPR은 친러시아 반군이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일부 지역에서 분리 독립을 선포한 국가다. 앞서 모스크바시는 지난달 말부터 '돈바스 광장의 수호자들' 'DPR 광장' '러시아의 영웅' 등 3가지를 놓고 온라인 투표를 했다.

당초 시의회는 '돈바스 광장의 수호자들'로 이름을 바꾸려고 했다. 그런데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이 "돈바스에서 조국을 지키고 있는 우크라이나 군인들을 기리기 위한 것으로 추정한다"며 불쾌하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 때문인지 모스크바 시의회는 자체적으로 결정하지 않고 시민 투표를 했고 DPR 광장이 선정됐다.

러시아 내 서방 대사관 땅 개명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 이달 초 러시아 독립 매체 모스크바타임스(MT)는 모스크바 주재 독일 대사관 앞 광장은 '루한스크인민공화국(LPR)'으로 바꿀 예정이라고 전했다. LPR 역시 돈바스 지역에 있는 친러 반군이 독립을 선언한 국가다. DPR과 LPR 모두 러시아 지원을 받고 있으나 국제 사회에선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WP는 "대사관 인근 지역 이름을 바꾸는 것은 드물지만, 외국 정부를 자극하기 위해 사용되는 도구"라고 했다. 독일 일간지 빌트는 "앞으로 우편을 보내는 등 주소를 쓸 때 친러 반군 공화국 이름을 언급해야 한다"면서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을 화나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고 전했다.

리투아니아 등, 러 대사관 거리에 '우크라이나 영웅로'

지난 3월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서 러시아 대사관 인근 도로 표지판이 ‘우크라이나 영웅로'라 적힌 표지판으로 교체되고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 3월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서 러시아 대사관 인근 도로 표지판이 ‘우크라이나 영웅로'라 적힌 표지판으로 교체되고 있다. AFP=연합뉴스

대사관 주변 지명 바꾸기는 서방이 먼저 시작했다. 리투아니아는 지난 3월 수도 빌뉴스 주재 러시아 대사관 거리 이름을 '우크라이나 영웅로'로 바꿨다. 레미기주스 시마시우스 빌뉴스 시장은 "모든 러시아 대사관 직원 명함에는 '우크라이나 영웅로'가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편물이 배달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이후 알바니아·라트비아·노르웨이·체코 등이 동참했다. 알바니아는 러시아 대사관이 위치한 도로에 '우크라이나 자유로'라는 이름을 붙였고, 라트비아는 러시아 대사관 주소를 '우크라이나 독립로'로 바꿨다. 노르웨이의 러시아 대사관 앞 교차로는 '우크라이나 광장'이 됐고, 체코에 있는 러시아 대사관 앞 도로 이름은 '우크라이나 영웅로'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런 작업이 온전히 환영받는 분위기는 아니라고 외신은 전했다. 호주 시드니 동부 울랄라 구의회는 관할 지역에 있는 러시아 총영사관의 주소를 '풀러톤 거리'에서 '우크라이나 거리'로 변경을 추진했다. 하지만, 일부 시민은 이를 반대했다고 ABC뉴스가 전했다. 시민들은 러시아 침공을 규탄하지만, 자신의 집 주소가 정치화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이름을 변경해 러시아 영사관과 충돌이 생길 수 있는 점을 우려했다.

'자말 카슈끄지 거리'…美, 정치적 메시지로 활용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가 지난 15일 주미 사우디 대사관 앞 도로에 '자말 카슈끄지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로이터=연합뉴스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가 지난 15일 주미 사우디 대사관 앞 도로에 '자말 카슈끄지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로이터=연합뉴스

대사관 땅 개명을 통해 대립 국가에 정치적 메시지를 내는 건 미국이 잘 쓰는 전략이다. 지난 2018년 주미 러시아 대사관이 위치한 워싱턴 DC의 위스콘신 에비뉴의 일부 구간 명칭이 러시아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다 2015년 피살된 야권 지도자 '보리스 넴초프'로 변경됐다. 지난 15일에는 워싱턴 DC 주재 사우디아라비아 대사관 앞 도로를 '자말 카슈끄지'로 명명했다. 자말 카슈끄지는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으로 2018년 터키 이스탄불의 사우디 영사관에서 살해됐다.

AP 통신에 따르면 미국 의회에선 지난 2016년 중국 인권 운동을 이끈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류샤오보(劉曉波)의 이름을 따서 중국 대사관 거리 이름을 바꾸자는 제안을 한 적이 있다. 당시 중국 외교부는 "류샤오보는 중국 법을 어긴 범법자다. 이름이 바뀌면 심각한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며 반발했고 결국 무산됐다.

우호 의미로 소련에 '루즈벨트 거리'·강남에 '테헤란로'

이란 테헤란의 도로가 출근길 시민들로 극심한 정체를 빚고 있다. 테헤란로처럼 이란에 만들어진 "서울로"로 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중앙포토]

이란 테헤란의 도로가 출근길 시민들로 극심한 정체를 빚고 있다. 테헤란로처럼 이란에 만들어진 "서울로"로 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중앙포토]

껄끄러운 관계지만 우호적인 도로명 변경도 있었다. 소련은 지난 1960년 흑해 연안 크림반도의 얄타 지역의 한 도로에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이름을 붙였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전후 처리를 위해 얄타를 방문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러시아의 한 매체는 "이 도로명은 러시아에서 미국 대통령의 이름을 딴 유일한 거리"라고 전했다. 크림 반도는 우크라이나 영토지만 러시아가 2014년에 점령했다.

서울 강남구 동서로 가로지르는 도로가 '테헤란로'가 된 것도 1977년 이란 수도 테헤란 시장 방한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양국의 우의를 다짐하면서 테헤란시에는 서울로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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