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시작은 동양도 서양도 아닌 ‘중양’

중앙선데이

입력 2022.06.25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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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4호 21면

인류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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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수 지음
휴머니스트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지금 어디에 있는가. 역사를 살펴 정체성을 찾는 일은 현대 사회와 개인의 주요 과제다. 우리를 제대로 규정해야 미래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있기 때문. 이를 위해선 서양에 치우쳤던 세계사 서술과 교육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다.

중동 역사와 이슬람 문화 전문가로 한양대 명예교수인 지은이는 동양도 서양도 아닌 ‘중양’이란 개념을 제시한다. 중동·이슬람권이나 제3세계에선 중동·북아프리카·중앙아시아·인도아대륙을 포괄하는 ‘중양’이 “5000년 인류사에서 적어도 4800년 동안 세계사의 중심축 역할을 했다고 가르친다”는 지적이다.

이는 서양이 그리스·로마에서 출발해 종교 중심의 중세 암흑기, 인본 중심의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을 거쳐 근대화를 먼저 이뤘음을 강조하는 유럽중심주의와 사뭇 다르다. 서양은 자신의 뿌리인 오리엔트·중동사를 변방사·지역사·비주류사로 낮춰 본다. 해방 이후 근대화와 서구화를 동일시해온 한국의 세계사 인식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화살통과 창을 지닌 페르시아 병사들 모습이 새겨져 있는 다리우스 궁전의 부조. [사진 휴머니스트]

화살통과 창을 지닌 페르시아 병사들 모습이 새겨져 있는 다리우스 궁전의 부조. [사진 휴머니스트]

물질과 유럽 중심주의를 앞세운 서양은 근대 이후 경제적으로 낙후하고, 국제정치적으론 허약하며, 종교적으로 이슬람 전통을 지켜온 문명의 본고장을 역사의 주변부로 밀어내왔다. 지은이는 이에 단호하게 ‘아니오’를 외친다.

이유를 살펴보자. 서양은 흔히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를 인류사의 여명으로 친다. 하지만 문명의 진짜 어머니는 오늘날 투르키예(터키) 중동부의 도시 유적인 차탈회위크로 봐야 한다는 게 지은이의 주장이다. 1950년대 후반 발굴이 시작된 이곳은 기원전 7500~기원전 5700년에 2000년 가까이 존속했던 ‘계획도시’다. 유네스코로부터 인류 최초의 도시로 인정받아 2012년 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약 200채의 집마다 창고·부엌·거실을 갖추고 정교한 벽화와 조각으로 장식했다. 벽의 황소 머리 장식과 독수리 형상, 이층으로 오르내리는 사다리는 고대인의 정신세계와 자연 추앙을 보여준다. 눈에 띄는 건 DNA 조사 등 과학적 연구 결과 이 도시는 주민들이 농경과 목축을 병행하며 공동육아제·공동노동·남녀평등을 누린 원시 공동체 사회로 밝혀졌다는 사실이다.

3800년 전의 바빌로니아와 2500년 전 페르시아 제국에서 확립된 통치시스템과 리더십·신앙·문화가 그리스·로마와 페르시아·이슬람 제국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일이다. 특히 282조에 이르는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법전’은 서양이 강조하는 인식·논리·가치에 대한 깊은 사유가 고대 오리엔트 세계에서 싹텄음을 보여준다.

법전의 서언과 결언에는 왕에게 통치권을 하사하면서 정의로운 사회 구현과 약자가 고통받지 않는 국가 운영을 주문하는 신의 명령이 담겼다. 3800년 전에 새긴 이 명문은 오늘날까지 울림을 준다. 로마법과 이슬람 율법의 원천이다.

전쟁과 평화에 영감을 주는 유산도 이 지역에서 나왔다. 기원전 1780~기원전 1180년의 500년간 번성했던 인류 최초의 철기 문명국 히타이트가 주인공이다. 팽창하던 히타이트는 기원전 1274년 세력을 확장하던 이집트와 중간지점인 카데시에서 충돌했다. 지역과 문명 간의 충돌로, 21세기 미·중 경쟁의 고대 버전이다.

하지만 전투 뒤 양국은 세계 최초의 평화조약을 맺고 파국을 피했다. 이를 기록한 히타이트 점토판 원본이 현재 이스탄불 박물관에, 복제품이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에 각각 걸려 있다. 인류가 고대에 보여줬던 타협의 지혜를 왜 21세기 우크라이나와 대만해협에선 발휘하기가 힘든 걸까.

페르시아·오스만튀르크·무굴 등을 두루 살피다 보면 둥글기만 한 지구에서 우리가 그동안 서양만 바라본 게 아닌지 성찰하게 된다. 오리엔트·중동 역사서에 『인류본사』란 도발적인 이름을 붙인 이유일 것이다. 이 지역이 신라·고려 등 고대와 중세 한국과도 교류했다는 점에서 결코 딴 나라 이야기만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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