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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세 변곡점, 나토 정상회의 D-4]미 주도 자유민주 질서 회복 vs 러·중 ‘신형 대국관계’ 형성…우크라 전쟁 파장 ‘신냉전’ 가시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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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4호 0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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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지 넉 달이 지났다. ‘중층적 3중 전쟁’ 즉 미국·나토 대 러시아, 러시아 대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 대 분리주의 돈바스라는 전쟁의 성격은 실체 파악을 어렵게 할 뿐 아니라 그 영향도 다층·다면적으로 확산되며 국제정치판을 뒤흔들고 있다. 전쟁 결과에 따라 전혀 다른 국제정세가 펼쳐질  것인 만큼 미래 국제정치를 예측하긴 아직 섣부를 수 있다. 하지만 이 전쟁이 향후 국제정세와 관련해 제기하는 질문은 분명하다.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국제정치 질서의 미래에 관한 질문이 그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미·중 전략 경쟁으로 인한 국제정치적 불안정성과 코로나 팬데믹에 따른 세계경제 침체를 넘어 근본적 도전을 제기하고 있다. 러시아는 미국이 복원하고 싶어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맞서 전혀 다른 국제질서의 필요성을 강변하고 있다. 일부에선 러시아의 지향을 ‘다극적(multi-polar) 국제질서’로 설명하기도 하지만 러시아가 추구하는 바를 잘 살펴보면 다극 질서보다 한발 더 나아가 지정학적 현실주의에 입각한 ‘다지역적(multi-regional) 세계질서’로의 전환에 대한 지향이 관찰된다.

다지역 질서란 전통적 지정학에서 말하는 국제적 강대국들이 세력권을 형성하며 만들어내는 지역적 정치 질서가 모자이크적으로 세계를 구성해 가는 틀을 의미하는데, 러시아는 바로 이런 지형 속에서 자신을 유라시아 강대국 및 중동과 동북아시아 등 유라시아 주변 지역의 핵심 이해 당사자로 자리매김하고 싶어한다. 이에 미국은 29~30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를 통해 총체적 대응 전략을 강구할 예정이다. 이번 정상회의가 21세기 국제정세의 중요한 변곡점이 될 것으로 전망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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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중동 지역 힘의 공백 파고들어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제국주의 시기를 연상시키는 러시아의 이 같은 지향은 당연히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미국 패권의 부정에 방점이 있다기보다 유라시아에서의 강대국 위상과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적 성격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테러와의 전쟁 시기 중앙유라시아에서 영향권 구축을 시도한 미국은 해양 세력으론 최초로 유라시아의 심장 지역에서 군사기지를 확보하는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지난해 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철수는 이 지역에서의 영향력 쇠퇴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여기에 셰일 혁명 이후 미국이 그동안 에너지 안보를 위해 중시하던 중동의 가치를 재조정하면서 중동 국가들 사이에 새로운 이합집산이 시도되고 있으며, 러시아는 이런 힘의 공백을 시리아 전쟁이나 이란 핵협상 등에서의 역할을 통해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우크라이나 전쟁도  유럽의 세력권을 지키기 위한 러시아의 대응 차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러시아의 입장은 미·중 전략 경쟁 중인 중국에도 유용한 자산이 될 수 있다. 중국이 미국에 요청하는 ‘신형 대국관계’도 러·중이 구축해 온 새로운 강대국 관계를 모델로 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최근 국제사회에서는 새 국제질서의 도래와 관련해 ‘신냉전’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다. 자유주의·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미국과 서방 국가들과 중국과 러시아 등 권위주의·전체주의 국가들이 두 진영으로 나뉘어 경쟁하는 체제가 자리 잡을 것이란 예측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임하는 미국의 정책은 이런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미국 등 자유주의 진영 국가들이 러시아를 비난하며 유례없이 강력한 제재를 부과하고 있다는 점에서다.

일부에선 이 같은 제재를 미국이 디커플링 정책을 통해 중국과의 경제적 상호의존을 줄이려는 정책과 연관 지어 해석하기도 한다. 반면 미국 경제가 하이테크 등 일부 분야에서만 중국 경제와의 디커플링이 가능할 뿐 전면적 분리는 어렵다는 주장도 만만찮아 속단하긴 어려운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 질서에서의 세력권 경쟁과 더불어 경제 분야 대립까지 심화될 경우 미·소 냉전 시기를 방불케 하는 ‘강 대 강’ 대결의 시기가 도래할 것이란 우려는 지워지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측면이 있다. 과거 냉전 시기와 달리 지난 30여 년의 지구화·지역화 유산이 만만찮다는 점이다. 특히 지구적 시장경제에는 적극 참여하지만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영향은 제한적인 이른바 ‘여타 국가들(the Rest)’의 부상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실 대러 경제 제재와 관련해 외견상으론 서방 국가들이 일치된 대응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많은 국가들이 러시아와의 경제적 상호의존 및 에너지 의존관계를 단칼에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심지어 주요 20개국(G20) 중 절반도 대러 제재에 동참하지 않거나 못하고 있다. 쿼드(Quad) 회원국인 인도는 러시아 제재에 나서지 않고 있고 오히려 러시아 원유를 1년 전보다 9배나 더 수입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미국의 국내정치 비판에 대응해 고유가를 잡기 위한 미국의 석유 증산 요청에도 긍정적 답변을 주지 않고 있다. 미국의 맹방인 이스라엘이 대러 제재에 동참하지 않는 상황은 미스터리다. 동남아 국가들이 인도·태평양 경제프레임워크(IPEF)에 적극 나서지 않는 상황도 주목할 부분이다.

더 나아가 이란·터키·베네수엘라 등 러시아와의 긴밀한 관계를 청산할 수 없는 국가들도 다수 포진해 있다. 이들은 대부분 미국 입장에서 볼 때 관계 개선에 난맥상이 노정됐던 국가들이다. 여기에 브릭스(BRICS) 네트워크도 다시 강화되고 있고 다수의 중동·아프리카·남미 국가들도 대러 제재에 신중한 태도를 보이거나 이반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탈냉전 30여 년 동안 지구촌의 ‘여타 국가들’이 미국·서방과는 다른 이질적 이익 구조를 강화해 왔던 것이다.

G20 중 절반, 대러 제재에 동참 안 해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이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세계경제에 끼치고 있는 단기적 충격은 물론 중장기적 변화 가능성과도 연관된다. 2년여 코로나 팬데믹의 악영향을 받은 세계경제를 회복하려는 노력이 시작되는 상황에서 벌어진 우크라이나 전쟁은 지구적 경기 회복에 커다란 악재로 작용하고 있다. 무엇보다 유가와 원자재·곡물 가격 상승에 따른 인플레 요인이 전지구적으로 강화되면서 지역을 불문하고 수십 년 만에 최악의 인플레를 경험하고 있다. 아시아·아프리카 곳곳에서도 시위가 확산되며 정치적 불안정성이 고조되고 있다.

게다가 미국 주도의 강력한 대러 제재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 압력을 더해가고 있다. 산업자본 대 금융자본의 대립을 넘어 자원 보유국의 영향력이 다시 커지고 있는 점도 예사롭지 않다. 이에 따라 새로운 공급망 선점을 위한 경쟁 또한 고조될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새로운 세계경제의 취약점으로 부상한 공급망 경쟁을 십분 활용해 서방의 경제 제재 예봉을 피하며 자원 및 경제 전쟁을 확산해 나가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후 세계는 일견 서방 진영과 러·중 전략 협력에 동조하는 진영으로 나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어느 한쪽에 완전히 동조하지 않은 채 자신의 이익 추구를 우선시하는 ‘여타 국가들’과 지정학적 중간국들의 수가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게 엄연한 현실이다. 주목할 건 현재 이들이 글로벌 정치·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냉전 시기 제3세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는 점이다. 특히 이들 국가가 오늘날 세계 경제위기의 중심에 위치한 에너지·식량 등 필수 자원의 지구적 공급망에서 중요한 위상을 점하고 있다는 사실은 국제정세를 두 진영의 대립 구도로만 규정하기엔 한계가 있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미국, 유럽·아시아 안보적 연결 모색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국제정세를 전망함에 있어 또 하나의 중요한 질문은 러·중 협력의 향방과 정도에 관한 것이다. 양국은 그동안 지정학적 현실주의 세력권 구현과 다극 질서 창출을 위한 전략적 소통을 지속해 왔다. 2000년대 초 ‘조율적 전략 협력’은 2010년대 ‘수렴적 전략 협력’을 거쳐 현재 ‘포괄적·전면적 전략 협력’ 단계에 도달한 상태다.

특히 양국은 지구·지역·양자 차원에서의 상이한 정책적 목표를 전략적 소통을 통해 조정해 왔으며, 그 과정에서 일대일로와 유라시아경제연합이 중첩되는 중앙유라시아를 둘러싼 상호 이익을 지속적으로 조율해 공존적 유라시아 지역 질서 창출에 성공하면서 전략적 비전을 공유하는 파트너가 됐다. 지구적으로는 다극 질서를 창출하고, 지역적으로는 다지역 질서의 균형화를 달성하며, 양자적으로는 신형 대국관계로 불릴 전략 협력을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중·러의 이 같은 전략 협력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에도 지속될 전망이다. 특히 양국은 자국의 강점을 활용해 ‘여타 국가들’의 현실적 이익을 채워줄 당근을 제공하며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국제질서 복원 노력을 견제하고 세계를 보다 다극적이며 모자이크적인 구성체로 만들어가는 데도 협력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를 견제하기 위해 미국은 이번 나토 정상회의를 계기로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위한 지구적 연대를 강화하려 하고 있다. 유럽과 아시아의 안보적 연결은 그 중요한 수단 중 하나다.

지금 세계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구체화된 지구적 대립 구도를 넘어 국제사회가 미국의 리더십하에 글로벌 질서의 원칙들을 회복할지, 아니면 러·중 전략 협력이 미국의 의도를 견제하고 보다 파편적인 다지역 국제질서를 추동할지 기로에 서 있다. 러시아 또한 유라시아 지역의 강대국으로서 위상을 굳건히 하게 될지, 아니면 전쟁의 여파로 고립주의 노선을 걸으며 지역 국가로 퇴보하게 될지 그 결과와 조만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급변하는 국제정치 현실 속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드러난 국제사회의 이질성을 극복하고 다원적 세계에 걸맞은 새로운 국제질서를 마련하는 데 있어 미국이 어떤 역할을 감당하고 어느 정도 리더십을 발휘하게 될지 그 단초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란 점에서 이번 나토 정상회의는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할 것이다.

신범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국제문제연구소 복합안보센터장과 외교부·국방부 정책자문위원을 맡고 있으며 『유라시아의 도전과 국제관계』 등의 저서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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