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과 백 사이 무수한 회색의 미학, 우리네 삶 같아

중앙선데이

입력 2022.06.25 00:02

업데이트 2022.06.25 0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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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4호 18면

흑백사진전 2제

세상이 온통 초록빛으로 물드는 신록의 계절 6월에 눈여겨볼 흑백사진전 2개가 22일 동시에 시작됐다. 7월 17일까지 서울 학고재에서 열리는 노순택 작가의 개인전 ‘검은 깃털’, 8월 21일까지 서울 갤러리 구조에서 진행되는 민병헌 작가의 개인전 ‘민병헌’이다.

두 사진가는 나이도 다르고, 오랫동안 천착해온 주제도 다르다. 한 사람은 세상을 관조하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쫓았고, 한 사람은 한국사회의 모순된 현장을 치열하게 쫓았다. 이번 전시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도 결이 다르지만 공통된 목소리는 있다. 흑백사진들을 통해 ‘흑(黑)과 백(白) 사이에 또 다른 다양한 색(色)이 존재함’을 말하고 있다. 흔히 눈에 보이는 세상을 흑과 백으로만 판단하려 하지만, 그 사이에는 일일이 이름붙일 수 없을 만큼 무수히 많은 회색이 존재한다. 우리의 삶도 좋고 싫음, 옳고 그름, 내편 네 편으로만 가르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으로 판단할 수 없는 이유다.

“실제 삶은 살짝 어둡거나 밝은 공간에”

노순택 작가의 ‘검은 깃털’ 전시 작품 중 2009년 대학로에서 당시 야당 대표 정세균·강기갑·문국현·노회찬 의원이 연설하는 뒷모습. [사진 노순택]

노순택 작가의 ‘검은 깃털’ 전시 작품 중 2009년 대학로에서 당시 야당 대표 정세균·강기갑·문국현·노회찬 의원이 연설하는 뒷모습. [사진 노순택]

노순택 작가는 분단체제에서 파생된 정치적 폭력과 갈등의 문제를 사진과 글로 엮어왔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대학원에서 사진학을 공부한 그는 자신을 ‘장면채집가’라고 소개한다. 72년 전 벌어졌던 한국전쟁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해석되며 오작동의 풍경을 펼쳐왔는지 면면을 관찰하고 수집해왔기 때문이다.

초대형 미군기지 확장으로 사라질 위기에 놓였던 평택 대추리에서 ‘황새울사진관’을 열고 용산참사, 한진중공업 사태, 강정마을 해군기지 강행 등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첨예한 대립과 갈등을 비롯해 국가폭력의 장면들을 수집하며 ‘분단의 향기’ ‘얄읏한 공’ ‘붉은 틀’ ‘좋은 살인’ ‘비상국가’ ‘망각기계’ 등의 국내외 개인전을 열었고 같은 이름의 사진집을 펴냈다.

“2009년 용산참사 때 폭력적인 도시 개발로 인한 비극을 앞에 두고도 한쪽에선 철거민과 그들의 연대모임을 향해 ‘빨갱이냐, 북한이 그렇게 좋으면 북한으로 가라’고 외쳤죠. 한국 사회에선 교육·의료분야에서 발생한 문제 조차도 분단 논리로 재단하는 시각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노순택 작가의 ‘검은 깃털’ 전시 작품 중 고층빌딩 공사장에서 촬영한 거대한 드릴링머신과 힘없이 떨어지는 한 줌의 흙. [사진 노순택]

노순택 작가의 ‘검은 깃털’ 전시 작품 중 고층빌딩 공사장에서 촬영한 거대한 드릴링머신과 힘없이 떨어지는 한 줌의 흙. [사진 노순택]

이번 전시에선 2015년부터 2020년까지 작업한 ‘검은 깃털’ 연작 19점을 선보이는데 모두 역광사진이다. 피사체 뒤에서 비치는 광선을 카메라가 마주하고 찍는 역광사진은 정상적인 사진촬영에서 가급적 피해야 할 조건이다. 피사체의 세부가 어둠에 묻혀 실루엣만 잡히기 때문이다. 노 작가는 “깃털(세부)이 윤곽에 갇혔다. 해서 무게가 달라졌는가. 무엇으로 무게를 가늠하는가”라고 질문했다. 그가 역광사진을 찍은 것도 “무언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가릴 수밖에 없는 역광사진이 극단주의자의 화법에 비유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언뜻 보면 세부는 없고 검은 덩어리로만 보이지만 반 발짝만 다가서면 세부가 보입니다. 없는 세부가 아니라 덜 보이는 세부죠. 이 편이냐 저 편이냐, 나누는 극단주의 화법이 환영받는 세계일지라도 개인들의 삶은 지나친 밝음 또는 어둠 속에 있지 않아요. 살짝 어둡거나 밝은 회색 공간에 실제 삶이 있죠.”

파리를 향해 돌진하는 르완다의 까마귀, 근대국가를 지탱하는 핵심기관이지만 정치지형에 따라 휩쓸리는 경찰들, 마천루를 짓기 위해 땅을 파는 드릴링 머신과 그 과정에서 힘없이 떨어져 내리는 한 줌의 흙, 2009년 대학로에서 당시 야당 ‘당수’들이었던 정세균·강기갑·문국현·노회찬 의원이 연설할 때 포착한 뒷모습까지. 19점의 역광사진은 “사태의 정면만이 아니라 뒷면과 옆면, 혹은 아랫면과 윗면을 더듬는 작업”을 해왔던 작가답게, 흑과 백으로만 치닿으며 결코 회색을 허용하지 않는 오늘의 한국 사회를 넌지시 은유하고 있다.

남의 손 닿는 걸 싫어해 필카 고집

민병헌 작가의 ‘스노우 랜드’. [사진 민병헌]

민병헌 작가의 ‘스노우 랜드’. [사진 민병헌]

민병헌 작가는 38년간 아날로그 흑백사진만 고집하며 촬영부터 현상, 인화까지 혼자 해온 사진가다. 젤라틴 실버 프린트 위에서 흑과 백, 그리고 그 사이 스민 수많은 회색이 은은하게 빛나는 미묘한 색감은 업계에서 ‘민병헌 그레이(grey)’라고 불릴 만큼 독보적이다.

작은 소리도 신경에 거슬려 환기팬도 없이, 마스크나 장갑도 없이 독한 화학물질과 씨름하며 집요하게 흑백사진 프린트에 몰두한 이유는 하나. 현상과 인화를 남에게 맡겨야 하는 컬러사진과는 달리 흑백사진은 전 과정을 직접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병헌 작가의 ‘바다’ 시리즈. [사진 민병헌]

민병헌 작가의 ‘바다’ 시리즈. [사진 민병헌]

그는 지금도 여전히 필름을 사용하는 롤라이 플렉스 중형 카메라만 고집한다. 사진을 찍고 그 자리에서 바로 보는 게 싫어서다. 촬영이 끝난 후 배낭에 필름을 넣고 집으로 돌아올 때 ‘내가 오늘 최고의 사진을 건졌다’고 느끼는 충만감이 너무 좋단다. 그는 사진을 소개할 때도 제목이나 수식어를 달지 않는다. “옛날부터 내 사진에는 메시지가 없었어요. 내가 지켜본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일 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 들어줘’라고 주장하기 싫으니까요. 그건 보는 사람이 알아서 할 일이죠.” 이기적일 만큼 스스로의 안목과 선택을 믿으며, 고요한 마음으로 사물과 현상을 관찰하고 비추어 보는 일은 그가 평생 추구해온 미학의 핵심이다.

이번 전시에선 ‘스노우 랜드’ ‘폭포’ ‘바다’ ‘몸(누드)’ 등을 주제로 작업한 흑백사진 50여 점을 선보인다. 눈여겨볼 점은 연작 사진들을 주제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란히 걸지 않고, 몸과 자연풍경을 번갈아 배치했다는 점이다. “우리 몸도 결국 자연의 일부죠. 인간과 나무·바다·눈·바람이 함께 이뤄내는 움직일 동(動), 고요할 정(靜)을 병치해서 진정한 자연스러움을 느껴보시라는 겁니다.”

그의 사진들에선 흑백의 경계가 무의미하다. 어느 순간엔 흑백과 컬러의 구분마저 모호해진다. 그냥 자연과 인간, 그대로의 모습만 다가올 뿐이다.  “말이 ‘흑백’이지 그건 그냥 눈으로 보이는 색을 부르는 용어일 뿐이죠. 흑백사진을 할수록 그 사이에 숨은 회색의 무궁무진함에 매번 놀라요. 그 색을 어떡하든 내 손으로 표현하고 싶어서 젊었을 때는 미친놈처럼 며칠 밤을 새며 매달렸는데 이제 눈도 침침해지고 기운도 달려서 2005년도 작업 ‘스노우 랜드’같은 프린트를 지금은 할 수 없어요. 대신 ‘바다’ 시리즈 같은 편안함이 생겼다면 다행일까요.”(웃음)

이번 전시에선 몸 연작 사진들만 모은 2권의 특별 에디션 북도 선보인다. 아트북을 만드는 김명수씨가 수작업으로 묶은 사진집은 각각 15권씩만 제작됐다. 가격은 권당 480만원이다.

두 사진전은 모두 입장 무료. ‘민병헌’전은 사전예약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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