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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인플레 꺾으려면, 정부 지출 억제해 솔선수범해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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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4호 14면

[SUNDAY 인터뷰] 김인호 전 무역협회장 

김인호 전 한국무역협회 회장은 물가 급등세를 꺾기 위해서는 방만한 재정 지출을 줄여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전민규 기자

김인호 전 한국무역협회 회장은 물가 급등세를 꺾기 위해서는 방만한 재정 지출을 줄여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전민규 기자

32.5%. 1980년 10월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다. 두 차례 오일 쇼크가 덮쳤던 70~80년대 물가는 무시무시했다. 20%대 물가상승은 흔했다. 물가가 다락같이 오르니 국민 살림은 어렵기만 했다. 아무리 경제가 고성장을 해도 헛일이었다. 그랬던 물가가 80년대 중반 1%대로 떨어졌다(87년 2월은 0.5%). 당시 ‘물가와의 전쟁’의 현장 지휘관 격인 경제기획원 물가정책국장(85~87년)은 김인호 전 무역협회장(전 청와대 경제수석). 김인호는 80년대 물가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한국 경제의 체질을 획기적으로 바꾼 ‘안정화 군단’의 멤버다. 김재익(전 경제수석, 아웅산테러로 순직), 강경식(전 재무부 장관), 김만제(전 경제부총리), 사공일(전 경제수석) 등이 주역이었다. 당시 물가정책국의 사무관이 추경호 현 경제부총리다.

이 ‘전설의 물가국장’을 만났다. ‘겨우’ 5%대 물가에도 휘청이는 한국 경제를 위한 처방책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물가를 확실하게 잡은 그때가 한국 경제를 비정상화에서 정상화로 돌려놓은 시작점”이라며 “그때를 기점으로 한국 경제의 정상적 운용이 가능해졌다”고 말했다. 또 “인플레 국면에선 물가 심리를 잡아야 한다”며 “대통령과 정부의 물가안정 의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당시는 전두환 대통령의 5공화국이었습니다. 독재권력의 완력이 있었기에 물가를 잡았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동의하지 않아요. 그 전만 해도 정부가 35개 독과점 품목의 가격을 하룻밤 새 조정하는 일도 있었어요. 하지만 제가 물가국장으로 있던 당시엔 정부가 민간의 개별 가격에 가급적 개입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심지어 공공부문도 가격조정이 필요한 합당한 경우에만 개입했지요. 가령 서울 지하철 요금은 올렸어요. 물가엔 다소 부담이 될지 몰라도 누적된 서울지하철 적자 개선을 위해선 불가피한 조치였으니까요. 물론 전제 조건으로 지하철공사에 뼈를 깎는 경영합리화 노력을 주문했고요.”

32%까지 치솟던 물가 1%대로 잡아

그런데도 어떻게 물가를 1%대로 잡을 수 있었나요.
“물가안정을 최우선으로 삼은 정부의 정책 방향, 대통령의 확고한 의지, 사회적 공감대라는 3박자가 맞아떨어진 결과지요. 차츰 국제여건이 나아지면서 수입 물가가 안정된 덕도 봤습니다. 무엇보다 전 대통령은 물가안정에 대한 의지를 실제 행동으로 보여줬어요.”
어떻게 말입니까.
“당시 물가국장은 매 분기 전 대통령에게 물가동향을 직접 보고했습니다. 대통령을 일 년에 한 번도 독대하지 못하는 장관이 흔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대통령이 그만큼 물가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방증이었지요. 다른 부처와의 의견 차이로 물가안정에 어려움이 있는 부분을 보고하면, 전 대통령은 대개 물가국장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대통령을 직접 만나 자주 보고하고, 대통령의 지지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실제 물가 관리에서 큰 힘을 발휘했지요.”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이 대목에서 김 전 회장은 전 대통령의 경제 가정교사였던 김재익 전 경제수석을 소환했다. 전 대통령에게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신뢰받았던 인물. 그는 군인 출신 대통령의 머릿속에 물가안정의 중요성을 확고하게 심어준 안정화 정책의 설계자였다. 당시 김 수석은 물가안정을 위해 예산과 통화의 강력한 긴축, 가격 직접 규제의 최소화 등을 주문했다. 당시의 물가안정은 거시경제운용의 총합이었고, 온 나라가 물가안정이라는 하나의 목표에 매달린 결과물이었다.

앞으로 물가가 오를 것으로 내다보는 기대인플레이션율도 뛰어오르고 있습니다. 기대인플레를 꺾으려면 무엇이 중요합니까.
“결국 정부가 솔선수범해야지요. 정부부터 지출을 억제해야 합니다. 정부는 방만하게 쓰면서 기업과 국민만 씀씀이를 줄이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물가를 안정시키려면 엄청난 고통을 감내해야 합니다. 물가가 뛰면 사람들은 가격을 올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런 심리를 잡는 것이 물가관리의 절반은 차지한다고 보면 됩니다. 시장을 경쟁적 구조로 만드는 것도 중요합니다. 경쟁적 시장에선 공급자가 쉽사리 가격을 인상할 수 없으니까요.”

당시 정부의 솔선수범은 빈말이 아니다. 정부는 84년 나라 예산을 동결했다. 사상 최초였다. 공무원 봉급도 동결했다. 그것도 국회의원 선거(85년)를 한 해 앞둔 시점에서였다. 당시 전 대통령은 “예산 동결 탓에 선거에 진다면 그런 선거는 져도 좋다”며 밀어붙였다(『대통령의 경제학』 이장규 지음). 그런 점에서 보자면 윤석열 정부의 출발은 재정 긴축과는 거리가 있다. 이미 소상공인들의 코로나 피해 보상을 위해 62조원의 추가경정예산을 시행 중이고, 대통령 선거 기간에 쏟아낸 선심성 공약도 적지 않다.

“돈 풀면, 푸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기분 좋지요. 그런데 나중이 문제입니다. 돈 풀면서 경제 안정 의지를 어떻게 보일 겁니까. 결국 돈의 양이 많으면 물가는 올라가고, 돈이 줄면 물가는 내려가는 겁니다.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재정을 줄이는 겁니다.”

경제가 어려울수록 취약계층을 보듬는 재정의 역할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원론적으로는 맞습니다. 예컨대 국가 방역 정책상 피해를 본 소상공인들에게 보상을 해주자는 취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경제 위기 때는 사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지금은 물가가 더 중요하다. 만약 물가를 못 잡으면 결국 돈 푸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 인플레로 돈 가치가 떨어지면 국민이 다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인식이 필요합니다. 그런 식으로 국민을 설득하고 재정의 고삐를 조여나가는 것이지요. 개인적으로는 추경 규모를 절반은 줄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적으로는 맞을지 몰라도 경제적으로는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셈입니다.”
선심성 공약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
“포퓰리즘적인 공약은 걷어내야지요. 대통령이 직접 간곡하게 물가안정의 중요성과 선거 때 했던 공약을 지킬 수 없는 사정을  호소하고, 국민의 이해를 구해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내년 예산안부터 필요 없는 지출은 과감하게 줄여나가야 합니다.”
결국 공공부문 개혁으로 이어집니다.
“지난 5년간 공무원이 대폭 늘었고, 예산도 방만하게 사용된 것이 많습니다. 정부가 필요 없는 일, 안 해도 될 일을 얼마나 많이 합니까. 대통령이 임기 5년 내에 공공부문을 개혁하기는 참 힘이 듭니다. 더구나 공무원은 법에 따라 신분 보장을 받고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혁명적 발상과 수단을 동원해야 합니다. 일례로 정부가 산업을 책임진다는 발상을 없애는 것이 필요합니다. 미국엔 개별 산업을 책임지는 부처가 별로 없고, 세계 최고의 농업국가인 네덜란드에 농업 전담 부처가 없는 이유를 살펴봐야 합니다.”
전기요금 등 공공요금은 인상요인이 누적돼 있습니다. 하지만 공공요금을 올리면 물가가 오를 텐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지난 정부 때 올려줬어야 합니다. 요금 인상을 다음 정권으로 떠넘긴 것 아닌가요. 그렇다고 언제까지 공공요금을 붙들어놓을 수 있을까요. 결국 현실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가가 시급하다고 가격부터 규제할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격을 억누르는 것이 능사가 아닙니다. 가격 기능을 죽여버리면 이중가격이 형성되고 경제가 엉망진창이 됩니다. 장기적으로는 원전 사용 비율을 높이고 경제성이 낮은 에너지원 사용을 줄여서 단가를 낮춰갈 수 있지만,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일입니다. 다만 한국전력 등의 공공요금을 면밀히 검토해서 경영 효율화를 통해 흡수할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흡수하도록 해야겠지요.”

방만해진 공공부문 개혁 절실

생활물가가 많이 오르다 보니 봉급생활자들의 임금 인상 요구가 분출하고 있습니다. 노동계에선 최저임금 인상 요구도 거셉니다.
“최저임금을 일률적으로 모든 기업체에 적용한다는 것 자체가 심각한 규제 아닌가요. 업종별로 경영 형태가 천차만별이고 지역별 사정이 다른데 일률적으로 같은 임금을 적용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겁니다. 무엇보다 최저임금을 정부가 책임져야 하는 구조와 관행에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금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금리 인상의 후폭풍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국제금융이 얼마나 이자율에 민감합니까. 0.1%만 높아도 돈이 몰려가지요. 한국 경제는 정말 ‘개찰구 없는 국제화’가 필요합니다. 유리할 때는 문 열고, 불리할 때는 닫는 것이 아니라 항상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거기서 해결책을 찾아가야 합니다. 금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이 금리를 올리는데 우리만 올리지 않으면 돈은 빠져나가기 마련입니다. 물론 국내여건상 금리를 올리기 어려운 측면도 있지요. 엄청난 가계 부채와 기업 부채가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대내외 균형이 충돌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럴 땐 원칙적으로 대외 균형을 우선할 수밖에 없습니다. 소규모 개방경제인 우리 경제의 숙명이지요.”

김 전 회장은 윤석열 정부의 물가 대책에 대해 “지금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쓰고 있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물가를 왜 안정시켜야 하는지에 대한 철학적 배경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아쉽다”고 말했다. “물가 안정은 궁극적으로 경제의 효율성을 높이는 길이며, 경쟁을 촉진해 소비자가 합리적으로 선택하도록 유도해야 물가가 잡힌다”는 확고한 신념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전설적인 물가국장 김인호의 생각은 들을수록 단순명료했다. ‘고삐가 풀린 물가를 끌어내려 안정시키려면 상당한 고통이 수반된다. 그러자면 우선 정부가 모범을 보여야 한다. 허리띠를 졸라매고 불필요한 지출을 줄여야 한다. 가격을 강압적으로 누르는 것은 하책이다. 시장경제를 제대로 하면 경쟁이 촉진되고, 경쟁을 통해 가격이 내려가게 된다. 그러자면 경제가 인기 위주의 정치논리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한국 경제는 왜 명쾌한 정도(正道)를 두고, 자꾸만 멀리 우회로를 택해 왔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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