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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덮친 '푸틴의 저주'...마크롱이 가장 먼저 당했다 [우크라 침공 넉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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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의 세베로도네츠크에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연기와 흙이 치솟고 있다. 연합뉴스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의 세베로도네츠크에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연기와 흙이 치솟고 있다. 연합뉴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발발한 전쟁이 넉 달을 맞으면서 유럽이 흔들리고 있다. 그간 러시아 응징을 목표로 단일대오를 과시했지만 전쟁발(發) 인플레이션으로 경제 침체가 심화되자, 전쟁 종식과 휴전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유럽 "우크라 지원 멈추고 전쟁 끝내자"

이탈리아에선 우크라이나 지원 문제를 놓고 연립내각이 붕괴될 조짐까지 보인다. 집권당인 오성운동(M5S) 당수이자 전 총리인 주세페 콘테는 “무기 지원은 전쟁을 연장해 불필요한 희생을 늘릴 뿐”이라며 “대화·협상을 통한 조속한 종전”을 주장한다. 우크라이나 지원을 주장하는 마리오 드라기 총리와 충돌이 계속되자, 콘테에 반발한 의원들이 탈당해 새로운 당을 결성하겠다고 지난 21일(현지시간) 밝혔다.

최근 싱크탱크 유럽외교협의회(ECFR)의 조사에 따르면, 프랑스·독일·루마니아 등에서 ‘전쟁을 최대한 빨리 끝내야 한다’는 응답(35%)이 ‘러시아를 응징해야 한다’는 답변(22%)을 앞섰다.

지난 16일 키이우를 방문한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오른쪽)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포옹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16일 키이우를 방문한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오른쪽)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포옹하고 있다. 연합뉴스

현재 우크라이나는 개전 이후 최악의 수세에 몰려 있다. 러시아는 키이우 퇴각 이후 동부 돈바스로 전선을 좁혔고, 막강한 화력을 앞세운 대규모 포병전으로 전환하면서 주요 요충지들을 차곡차곡 함락시키고 있다. 이를 패퇴시키고 “크림반도(2014년 러시아 병합)까지 회복하는 승리”가 우크라이나의 목표지만, 서방의 무기와 재정 지원 없인 어림 없다. CNN은 “이번 전쟁이 승패가 판가름 나는 변곡점에 도달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푸틴플레이션'이 야기한 서방 균열

무엇보다 대러시아 에너지 제재가 서방에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 독일은 23일 러시아의 가스 공급이 줄어들면서 가스 비상공급계획을 2단계인 '경보(Alarm)'로 상향 조정했다. 유럽연합(EU)은 제살 깎는 고통을 감내하며 러시아산 석탄·석유 금수 조치에 나섰지만 오히려 이는 가스·원유 가격을 폭등시켜 러시아의 잔고를 불려주고 있다. 나아가 러시아가 제재 맞불로 유럽행 천연가스관을 차례로 잠그고 흑해를 통한 식량 수출을 통제하자 이는 각국의 물가 불안으로 번지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개 가입국의 지난 4월 소비자물가는 9.2% 상승했다. 외환위기 시절이던 1998년(9.3%) 이후 최고치다. 식료품(11.5%) 가격이 가장 많이 올랐다. 유로존의 지난달 소비자물가는 8.1%, 미국은 8.6% 치솟아 모두 40년만에 최고치였다. 이른바 ‘푸틴플레이션(푸틴+인플레이션)’의 습격이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물가 급등 속에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시위도 불붙었다. 영국에선 철도 노조가 33년 만에 최대 규모 파업에 돌입한 데 이어, 법조·의료·교육 분야 노동자까지 파업 참여 조짐을 보이고 있다. 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포르투갈에선 항공 관련 노동자들이 다음 달 파업을 예고했고, 벨기에는 20일 브뤼셀공항 보안요원의 파업으로 모든 출발 항공편이 취소됐다. 영국 철도 파업에 참여 중인 재러드 우드는 “싸우지 않으면 월세도, 난방비도 내지 못한다”며 절박한 심정을 토로했다.

이로 인한 민심 이반에 프랑스 정부가 먼저 된서리를 맞았다. 지난 19일 열린 총선에서 여당은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프랑스의 집권당이 과반을 차지하지 못한 건 20년 만에 처음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가스‧전기료 상한선 설정 등으로 지지층의 마음을 돌리려 했지만 실패했다.

선거를 앞둔 다른 나라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독일은 오는 10월, 민심의 이정표로 불리는 니더작센에서 주의회 선거를 치른다. 이탈리아는 다음해 6월 총선 일정이 잡혔다. 미국은 오는 11월 중간선거를 앞뒀다.

지난해 11월 독일 석탄화력 발전소의 모습. 연합뉴스

지난해 11월 독일 석탄화력 발전소의 모습. 연합뉴스

유럽은 고심 끝에 탈(脫)석탄 정책마저 내려놨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지난 19일 석탄발전소 긴급 재가동 방침을 발표했고, 이튿날 네덜란드도 석탄발전소를 최대 35%까지 가동할 수 있도록 법 개정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이탈리아 등 다른 EU 국가도 비슷한 결정을 고려하고 있다. 일부 지역 언론은 “탄소 중립과 러시아 응징 중 우선순위를 고민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현재 우크라이나는 애타게 SOS를 외치고 있다. 지난 19일 드미트로 쿨레바 외교장관은 “미국과 유럽 동맹국은 우크라이나에 신속히 적정한 숫자의 고성능 중화기를 공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서방은 기존 대러 제재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새로운 제재를 더 부과하라”고 요구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서방, 대의명분·현실, 선택의 순간"

반면 러시아의 루블화 가치는 대러 제재를 비웃기라도 하듯 7년만에 최고치다. 블룸버그는 올 들어 루블화 가치가 35% 올랐고, 달러 대비 수익성으로 볼 때 루블화는 ‘올해 최고의 통화’라고 전했다. 특히 에너지 가격 급등이 루블화 가치를 밀어올렸다.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지난 21일 “푸틴은 전장의 교착상태와 관계없이 우크라이나를 지지하는 서방의 단결력이 약해지길 기다리고 있다”고 분석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러시아를 겨냥한 서방의 노력이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고 전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외신은 서방이 대의명분과 현실 사이에서 선택의 순간을 맞았다고 전했다. 침략 전쟁, 민간인 학살 등 수많은 전쟁 범죄를 저지른 ‘러시아 응징’이란 명분은 분명하지만, 자국민의 고통을 외면한 채 무한정 우크라이나를 지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방은 EU 정상회의와 주요 7개국(G7) 및 나토 정상회의 등을 잇따라 개최하면서 내부 단속과 함께 대안 모색에 나섰다.

워싱턴포스트(WP)는 “서방은 러시아가 주변 나토 회원국을 넘보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군수 지원을 지속하고, 우크라이나는 한반도와 같이 종전없는 휴전상태가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자충수가 된 대러 제재를 일부 완화할 가능성도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2일 러시아산 원유 수출을 허용하되, 가격 상한선을 두자는 미국의 제안이 EU에서 동의를 얻고 있다고 전했다. 대러 제재에 일부 예외를 허용해, 치솟은 유가와 인플레이션을 완화하려는 조처로 풀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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