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고정애의 시시각각

문재인과 박시환, 인혁당 피해자

중앙일보

입력 2022.06.24 00:38

업데이트 2022.06.24 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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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고정애 논설위원

고정애 논설위원

인혁당 사건 자체는 박정희 정권 때인 1975년 전후의 일이다. 간첩으로 조작, 8명이 사형당하고 17명이 장기투옥됐다. 33년 지나서야 무죄로 바로잡혔다. 노태악 대법관이 2년 전 인사청문회에서 역사상 가장 아쉬웠던 대법원 판결로 이걸 뽑으며 ‘사법 살인’이란 표현을 썼다.

2011년 대법원 판결로 배상금 환수
문재인 청와대 피해자 구제 미온적
이걸 해결 못한 진보가 진보인가

최근 주목받은 인혁당 사건 피해자 소송은 좀 다르다. 거칠게 정리하면 ‘진보 대법관’에서 기인했고 ‘진보 대통령’조차 손을 놓고 있었다는 게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원인 자체는 2011년 대법원 판결이다. 앞서 피해자들은 국가정보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고 1심에서 위자료 279억원과 유죄 판결이 확정된 75년 4월 9일 시점부터 지연이자(연 5%)를 지급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모두 759억원이었다. 이 중 490억원이 가지급됐다. 그런데 대법원이 지연이자 발생 시점을 항소심인 2009년으로 변경, 확정했다(파기 자판). “장기간의 세월이 경과됐고 통화가치 등에 상당한 변동이 생겼다”는 이유를 댔다.

금태섭 전 의원이 2017년 전한 내막은 이랬다. “보수-진보로 팽팽하게 갈려 긴장이 높던 대법원의 내부 형편상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는지(싶었는데), 돌아온 전언은 그런 사정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냥 그 대법관이 보기에 손해배상금이 너무 많다고 여겼다고 한다.”

2017년 2월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지낸 문재인 전 대통령이 서울 여의도의 한 영화관에서 사법피해를 주제로 한 영화 '재심' 관람에 앞서 영화의 실제 주인공 들 및 사법피해 가족들과 만나고 있다. 이날 만남에는 김태훈 감독, 박준영 변호사, 황산만 군산서 전 수사반장, 최인철-장동익 엄궁동2인조 살인살건 피해자를 비롯해 인혁당 유가족들이 참석했다. 국회사진기자단

2017년 2월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지낸 문재인 전 대통령이 서울 여의도의 한 영화관에서 사법피해를 주제로 한 영화 '재심' 관람에 앞서 영화의 실제 주인공 들 및 사법피해 가족들과 만나고 있다. 이날 만남에는 김태훈 감독, 박준영 변호사, 황산만 군산서 전 수사반장, 최인철-장동익 엄궁동2인조 살인살건 피해자를 비롯해 인혁당 유가족들이 참석했다. 국회사진기자단

‘그 대법관’은 ‘진보 사법의 아이콘’으로 불리는 박시환 대법관이었다. 4인 소부의 주심 판사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끄럽지 않게 양심에 따라서 자기의 직업을 수행하면서 인생을 살 수 있는 권리가 무엇이며 또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말하기 위해 스스로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고 상찬하고, 문재인 전 대통령이 2017년 “대법원장이 되어달라”고 요청했던 인물이다. 그는 “소수자, 소외된 자, 약자의 행복”(“『대법원, 이의 있습니다』)을 외치곤 했다. 왜 그런 판단을 했던 것일까.

결과적으로 피해자들은 한마디도 못 하고 34년 치의 지연이자를 토해내야 했다. 반환해야 할 돈이 211억원이었다. 변제하지 않으면 연리 20%의 지연이자도 물렸다. 이번 소송의 당사자는 반환 원금이 5억원이었는데, 여기에 붙은 지연이자가 9억6000만원까지 자랐다.

문재인 정부의 지난 5년도 기이했다. 국정원이 환수에 나서자, 문 정권과 가까운 이들이 뛰었다. 2017년 법무부 법무·검찰개혁위에 이어 2019년 국가인권위에서 구제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하지만 청와대가 미온적이었다고 한다. 금 전 의원은 “총리실이 관심을 가지고 해보려고 했으나 청와대가 움직이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한다.

문 정권은 이런 논리를 댔다. KBS 정연주 사장이 세금을 더 환급받을 수 있는데도 법원 조정을 통해 이를 포기해 배임죄로 기소됐으니 이번 건도 포기할 수 없다고 말이다. 정 사장 건은 무죄로 확정됐다. “국가채권관리법상 국내 채권을 포기할 규정이 없다”고 했다고도 한다. 정작 윤석열 정부의 법무부는 길을 찾아냈다. 채무자의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에 의하지 아니할 경우 연체금(지연이자분)을 면제할 수 있는 조항(제32조 2항,시행령 제32조 3항)을 적용했다.

사실 문 전 대통령과 진보 진영에 인혁당 사건은 ‘심장’ 가까이 있는 사건이다. 문 전 대통령이 인혁당 사건 사형 집행 다음 날 유신 독재 화형식을 주도하다 구속됐다는 건 널리 알려졌다. 종종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을 만난 일도 있다. 의당 해결 의지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도 어디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능력이 없어서? 대법원 확정판결이어서? 진보 대법관이 걸린 문제라?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정치적 이해에 반하는 일이면 문제 해결 능력이 떨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긴 하다(『우리는 왜 서로를 미워하는가』). 이게 문 전 대통령의 정치적 이해에 반하기라도 했던 것일까. 진정한 의문은 이거다. 이 사건도 풀지 못한(또는 안 한) 진보가 진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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