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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추억] 한국 경제학 기틀 다진 흰눈썹의 거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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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조순 전 경제부총리가 94세로 별세했다. 고인은 경제학자이면서 관료, 정치인으로 한국 경제 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3년 서울 봉천동 자택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중앙포토]

조순 전 경제부총리가 94세로 별세했다. 고인은 경제학자이면서 관료, 정치인으로 한국 경제 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3년 서울 봉천동 자택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중앙포토]

경제학계의 ‘거목’ 조순 전 경제부총리가 23일 새벽 숙환으로 별세했다. 94세.

조 전 부총리는 한국 경제학의 기틀을 다진 경제학자로 경제부총리, 한국은행 총재, 서울시장, 여당 총재를 지냈다. 경제와 정치를 아울러 유례가 드문 이력을 쌓은 인물이다. 흰 눈썹을 가진 그는 여럿 중 가장 뛰어나다는 뜻도 있는 ‘백미(白眉)’로 불리기도 했다.

1928년 강원 강릉에서 태어난 조 전 부총리는 서울대 상과대를 졸업하고 미국 보오든대에서 학사, 버클리 캘리포니아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았다. 67년부터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학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가 쓴 『경제학원론』은 74년 출간 이후 지금까지 경제학 개론서로는 가장 널리 읽힌, 한국 경제학의 토대 역할을 한 저서로 평가받는다. 이후 제자인 정운찬 전 국무총리 등이 이 책 개정판의 공저자로 참여했다. 조 전 부총리는 ‘한국의 케인스’로 불리며 ‘조순학파’라 일컬어지는 많은 후학을 길러냈다.

그가 육사 교관이던 때 제자였던 노태우 당시 대통령에 의해 88년 경제부총리 겸 경제기획원(현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발탁됐다. 고도 성장기와 맞물려 부동산 투기가 기승을 부리던 시기 그는 토지공개념을 제시했다. 특정 소수에 집중되는 부동산 개발 이익을 환수해 낙후 지역 개발 등에 써야 한다는 주장이다. 토지종합세 신설 등 토지공개념 3법을 추진했다. 이후 위헌 판정을 받으며 토지공개념법은 효력을 잃었지만 현행 부동산 세제, 개발부담금제의 토대가 됐다.

92년 그는 한은 총재로 임명됐다. 한은이 ‘재무부 남대문 출장소’로 불리던 시절 그는 중앙은행 독립과 금리 자유화를 주장했다. 당시 경제 활성화를 위해 통화정책을 활용하려 했던 정부와 갈등을 빚었고, 결국 임기를 3년이나 남겨 놓고 한은 총재 자리에서 물러났다.

고인의 서울대 제자인 정운찬 전 국무총리가 서울아산병원 빈소를 찾아 헌화하고 있는 모습. [뉴스1]

고인의 서울대 제자인 정운찬 전 국무총리가 서울아산병원 빈소를 찾아 헌화하고 있는 모습. [뉴스1]

관가를 떠난 그는 아태평화재단 자문위원을 하면서 만난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로 정치에 발을 디뎠다. 민주당에 입당해 95년 서울시장에 당선된다. 길고 흰 눈썹, 강직한 언행 덕분에 ‘서울 포청천’이란 별명도 얻었다. 당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주인공 ‘판관 포청천’을 빗댄 말이었다. 이후 민주당 총재를 맡았고, 신한국당이 합쳐져 탄생한 한나라당(현 국민의힘)에서도 총재를 2번 더 지냈다. 2002년 그는 정치권을 떠나 서울대 명예교수 자리로 돌아갔다. 대통령 직속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 한반도선진화재단 고문 등 학계 원로 역할을 해왔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오후 고인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아산병원을 직접 찾아 조문했다고 대통령실이 밝혔다. 한덕수 국무총리도 빈소를 찾아 대학 스승인 고인을 떠올리며 “시장에 대해 직접 규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교수님의 학자적 소신이었다”고 추모했다.

양대 경제수장인 추경호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 이창용 한은 총재도 조 전 부총리와 인연이 있다. 추 부총리는 고인이 경제부총리로 재직하던 때 비서관이었고, 이 총재는 고인의 수업을 직접 들은 제자다. 이들은 고인을 추모하는 입장문을 냈다.

추 부총리는 “한국 경제가 갈림길에 있을 때마다 기본에 충실하며 바르게 갈 수 있는 정책을 고민했던 고인의 모습이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다. 고인의 뜻을 받들어 한국 경제가 정도를 걸으며 더욱 발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이 총재는 “경제학자로서는 물론이고 한은 총재와 경제부총리를 역임하면서 한국 경제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긴 분”이라고 밝혔다.

유족으로는 부인 김남희씨, 장남 조기송(전 강원랜드 대표)씨와 조준·건·승주씨가 있다. 발인은 25일 오전이다. 강릉 구정면 학산리 선영에 안장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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