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시간과 더불어 사는 법:비판을 제도화하라

중앙일보

입력 2022.06.23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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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연애하듯 하는 정치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그 어떤 것도 결국 시간과 더불어 지나간다. 분노도, 고통도, 증오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완전히 사라지지 않더라도 적어도 엷어진다. 불행이 엄습했을 때, 이 깨달음은 위안이 된다. 나쁜 일이 닥칠 때, 습관적으로 중얼거린다. 이것도 결국 지나갈 거야. 뼈아픈 실수도 결국 잊혀질 거야. 역겨운 직장 상사도 결국 은퇴할 거야. 실망스러운 리더의 임기도 언젠가는 끝날 거야. 지금 이 순간 느끼는 통증조차 영원하지 않을 거야. 다행히도.

이것이 축복인가. 꼭 그렇지만은 않다. 지나가는 것이 어디 나쁜 일뿐이랴. 좋은 일도 지나간다. 영원한 일등 같은 것은 없다. 영원한 인기 같은 것도 없다. 사람들의 환호는 시간이 지나면 잦아든다. 영원할 것 같던 스타의 인기도 결국 식는다. 지나간 연애를 떠올려보라. 시간이 흐르자 한때 뜨거웠던 감정도 절로 식지 않던가. 열렬히 사랑해서 시작한 연애였건만, 어느덧 활력은 사라지고 권태가 찾아온다. 상대에게 소홀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소홀함과 무신경을 참지 못하는 사람이 경고를 시작한다. 경고가 반복되어도 변화가 없으면 상대는 결국 떠나버린다.

세속의 시간은 활력 빼앗고
권태·나태·관성을 안겨줘
비판이 없으면 퇴화 불가피
비판과 다양성을 환영해야
생각의 공화국

생각의 공화국

먼저 소홀해진 사람의 잘못일까. 아마 그렇겠지. 그러나 전부 그의 잘못만은 아니다. 상당 부분, 시간이란 녀석에게도 책임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감정은 식게 되어 있다. 시간은 연애하는 사람들 편이 아니다. 결국 연애는 끝난다. 이런 시간의 동학이 꼭 저주일까. 꼭 그렇지는 않다. 연애가 불러오는 감정의 고조 상태가 너무 오래 유지되면, 신경이 타버려 죽을지도 모른다. 제정신으로 생활하기 위해 연애 감정이 사그라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연애가 끝나 후련한 점도 있을 수 있다. 식은 감정을 애써 불붙여야 하는 고된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되니까. 헤어져야 비로소 새로운 가능성이 생기기도 하니까.

상대에 대한 설렘이 끝나가는 연인들은 이제 선택을 해야 한다. 관계를 끝내고 타인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결혼 같은 제도의 힘을 빌려 관계를 지속할 것인가. 그 어느 쪽이든 연애의 종말이라는 점은 다를 바 없다. 아, 상대와 오래 오래 연애하고 싶다고? 그렇다면 비상한 노력이 필요하다. 관계가 늘어지지 않도록 일정한 긴장을 부여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가끔 낯선 곳에 여행을 가는 것도 권태를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 의도적으로 주말 부부가 되는 것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 아침에는 죽음을, 아니 이별을 생각하는 것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 오늘 이별 통고를 받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상을 하다 보면 정신이 쭈뼛 들 것이다. 아침에 이별을 생각하는 사람은 시간의 동학을 숙지하고 연애에 임하는 사람이다.

이게 어디 연애만의 일이랴. 예술도 마찬가지다. 프랑스의 중세사학자 미셸 파스투로(Michel Pastoureau)는 중세 시대 색채에 대한 2012년 루브르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 티치아노나 베로네제 같은 화가들은 자신들의 작품 색채가 시간이 흐르면 바랠 것을 염두에 두고 그림을 그렸다고. 그렇다면, 티치아노나 베로네제는 시간의 동학을 고려한 예술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위대한 예술작품도 결국 시간의 풍화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변색하고 말 것이다. 일정한 주기로 복원을 한들, 그 사이 변색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사실을 인지한 예술가는 변색이 와도 감상할 가치가 있는 그림을 그리거나, 변색 가능성과 더불어 살아갈 그림을 그려야 한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기독교가 지배하던 유럽 중세의 시간은 오늘날처럼 흐르지 않았다. 그 시절 사람들 대다수는 세속의 시간에 오늘날 같은 비중을 두지 않았다. 질병과 갈등과 악이 창궐하는 이 세속의 시간은 조만간 끝날 것이다. 그 세속의 시간 뒤에는 영원한 구원이 기다리고 있다. 이러한 세계관 속에서는 세속의 정치보다는 구원 뒤에 도래할 영원의 정치가 더 중요하다. 인간의 나라보다는 언젠가는 도래할 신국(神國)이 더 중요하다.

이러한 기독교적 믿음이 약화되자 사람들은 전혀 다른 시간, 구원을 약속하지 않는 시간과 마주하게 되었다. 구원의 순간은 오지 않는다. 기승전결이 없는 세속의 시간만이 앞에 펼쳐져 있을 뿐. 어떤 멋진 정치적 구상을 하든 그 구상은 신국에서 실현될 것이 아니라, 세속의 시간 속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이 세속의 시간 속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 따라서 정치의 주요 과제는 이 세속의 시간과 싸우는 일이 된다. 어떤 멋진 정치적 이념이나 체제도 시간의 풍화를 견디기 어렵다. 사람들은 부패하고 게을러지며 제도는 낡고 삐걱거릴 것이다. 이 와중에 어떻게 정치체의 활력과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구원의 약속이 없는 이 세속의 시간을 견딜 것인가. 이것이 새로운 시간을 맞이한 정치 철학적 질문이다.

이것이 어디 지나간 역사 속에만 있는 일이랴. 촛불 시위를 거쳐 극적인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자, 오욕의 시간이 끝나고 마침내 구원의 순간이 도래한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일부 정치인의 눈에는. 그들은 촛불 시위에다 기꺼이 “혁명”이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영원한 구원, 아니 전과는 차원이 다른 도덕적 정치의 지속을 꿈꾸기 시작했다. 백 년 가는 정당, 수십 년 가는 집권을 전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세속의 시간은 가혹하다. 극적으로 정권 교체에 성공한 정당이 불과 몇 년 만에 정권을 다시 내주고 만 것이다. 전례 없는 장기집권을 꿈꾸던 정당이 단 한 번도 재집권하지 못하고 정권을 넘겨준 과정은 촛불 “혁명”만큼이나 극적이다.

이러한 극적인 상황 전개가 관련 정치인에게 준 충격은 곳곳에서 감지된다. 앞다투어 특정인의 책임을 거론하기도 하고, 과감하게 삭발을 단행하기도 한다. 그뿐이랴. 지난 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낸 정치인은 탄식한다. “한때는 우리가 거의 가나안에 도달했다고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날 맞닥뜨린 현실은 황당하기 그지없습니다. 아니 고작 여기로 오려고 그토록 기약 없던 세월을 우리가 광야에서 보냈단 말인가?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서 길을 잃었던 것일까? 우리는 무엇을 잘못했던 것일까?”

이 말을 통해 이들이 스스로를 의로운 존재로 생각했다는 것, 그리고 (집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약자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는 것, 고난을 감수해왔다는 서사를 누려왔다는 것, 지속되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어떤 구원의 순간을 꿈꾸었다는 것, 구원의 순간 이후에는 정의로운 세상이 죽 도래하리라 믿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 구원의 순간이 오긴 왔다. 다만 그것이 지속되지 않았을 뿐. 절반이 넘는 유권자들이 민주화 운동 경력으로 빛나는 그들을 더이상 의로운 약자라고 간주하지 않는다. 그래서 정권이 바뀌었건만, 다시 광야를 걷게 된 “의로운 약자”는 여전히 묻는다. “우리는 무엇을 잘못했던 것일까?”

이토록 멜로 드라마틱한 질문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정권 연장 실패에 대한 반성의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지난 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낸 또 한 명의 정치인은 외친다. “문제는 패권의 교체가 아니라 가치의 복원과 민주당다움, 동지적 덕성의 복원입니다. 민주당의 빛나는 가치, 고결한 동지애! 그것부터 단결의 깃발로 다시 내걸어야 합니다. 민주당의 빛나는 가치를 품은 사람에게 아낌없이 갈채하고 그의 진정성을 중심으로 흔쾌히 손을 내밀어 연대하고 단결해야 합니다. 그게 바로 민주당다운 고결한 도덕성의 근거입니다. 단결의 덕성, 그 역시 민주당의 순결한 사상입니다.”

한때 영원하리라 믿었던 연인의 감정도 시간이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변색하는데, 다수가 모인 정당의 가치가 변모하지 않을 수 있을까. 기어이 성불하고자 속세를 떠난 성직자의 초심도 시간이 지나면 탈색되는데, 현실 정치의 한가운데 있는 정당의 진정성이 오래 유지될 수 있을까. 갈등과 조정과 타협을 거치게 되어 있는 정치인들이 이른바 고결한 동지애를 지속적으로 발휘할 수 있을까. 그 연대와 단결이 시간의 풍화를 이겨낼 수 있을까. 과연 어떻게?

시간의 풍화를 이겨내려면, 일단 시간의 풍화를 피할 수 없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인식이 필요하다. 특정 정당은 물론, 한국이라는 정치체가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세속의 정당이 의로운 위상을 지속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영원한 것은 없다. 시간은 활력을 빼앗고 권태와 나태와 관성과 타락을 남겨준다.

그러한 시간 속에서 건강과 활력을 유지하려면, 자신의 사고방식에 정면 도전하는 비판적인 존재를 환영하는 것이 좋다. 기존 가치와 불화하는 이질적 존재를 환영하는 것이 좋다. 자신의 안위를 위협하는 적마저 환영하는 것이 좋다. 그러한 이들이야말로 자신의 지속적이고 건강한 생존에 필수적인 긴장과 자극을 제공하는 존재들이니까. 비판이 없으면, 긴장도 없고, 긴장이 없으면 퇴화는 불가피하다. 관건은 그러한 비판을 제도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듣기 싫겠지, 정말 쓴소리는.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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