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남정호의 퍼스펙티브

바이든의 자승자박... 대러 제재, 최악의 인플레 자초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6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우크라이나전이 바꿔놓은 국제 질서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예상과는 달리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가 점쳐지면서 지구촌 분위기가 급변하고 있다. 미국이 러시아 푸틴 정권을 압박하기 위해 꺼내 든 경제 제재 카드가 부메랑이 돼 최악의 인플레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바이든 행정부의 인기는 사상 최악으로 떨어지며 전쟁 양상마저 바뀌는 형국이다. 이 같은 상황 변화의 배경과 한미관계 등 국제질서에 미칠 영향을 짚어본다.

러 수출 중 에너지 비중 42% 차지 #원유가 올라 러 수입 도리어 증가 #이란 제재 성공 경험이 오판 불러 #한국에 대한 미 협력 압박 세질 듯

남정호의 퍼스펙티브

남정호의 퍼스펙티브

경제 제재로 러 약화 시도
우크라이나가 기대 이상으로 선전하자 미국은 이번 전쟁을 러시아 국력 약화의 호기로 보고 젤린스키 정권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왔다. 처음에는 확전 우려로 공격용 무기 공급에 소극적이었으나 의외로 우크라이나가 잘 싸우는 데다 러시아군의 잔혹 행위가 속속 드러나면서 헬기와 장갑차까지 지원하게 됐다. 결국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제공한 무기 등 각종 지원 규모는 56억 달러(약 7조2000억 원)에 달했다. 미국은 또 식수·의료품·생필품 등 9억1400만 달러 규모의 인도적 지원도 해왔다.
러시아의 공세에도 우크라이나가 두 달 넘게 버티자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지난 5월 초강수를 둔다. 러시아의 원유 및 천연가스에 대한 경제 제재를 단행한 것이다. 이 같은 조치는 러시아의 사기를 꺾을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큰 타격을 줄 것으로 기대됐다. 원유 및 천연가스 등 에너지 분야에 대한 러시아의 의존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러시아 전체 수출 중 원유·석유제품·천연가스 등 에너지 관련 품목이 차지하는 비중은 42.8%에 달했다. 이 때문에 공화당의 중진이자 대선후보였던 고(故) 존 매케인 상원의원은 "국가를 가장한 거대한 주유소"라고 러시아를 평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대러 원유 및 천연가스 제재는 러시아의 재정 수입 급락을 불러 푸틴 정권이 전비를 마련할 길을 차단할 것으로 기대됐었다. 아울러 우크라이나전 희생자가 급속하게 늘면서 러시아인들의 불만도 팽배해 반전 여론도 커질 것으로 바이든 정권은 봤다.

지난 14일 미국 워싱턴 D.C. 주유소에 걸린 휘발유 가격표. 올해 초 갤런 당 1 달러 선에 머물렀던 휘발유 가격이 6달러를 돌파했다. AFP=연합뉴스

지난 14일 미국 워싱턴 D.C. 주유소에 걸린 휘발유 가격표. 올해 초 갤런 당 1 달러 선에 머물렀던 휘발유 가격이 6달러를 돌파했다. AFP=연합뉴스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미국의 에너지 업계의 이익도 고려 대상이 됐을 게 분명하다. 신기술을 이용한 셰일 오일 및 가스 추출이 대중화되면서 미국은 에너지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변신했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침공을 명분으로 러시아산 원유 및 천연가스의 수출을 막으면 그만큼 미국의 에너지 기업들이 이익을 보게 되는 것이다.
어쨌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미국은 푸틴 정권이 백기를 들 것으로 기대하며 유럽의 나토 동맹국과 캐나다·호주·뉴질랜드 및 한국·일본 등 전통적 우방국들도 제재 대열에 동참하도록 만들었다.

바이든의 오판
그러나 결과는 대실패였다. 무엇보다 러시아가 유럽 및 여타 지역 시장을 잃었지만, 전체 수입은 줄기는커녕 도리어 늘어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러시아산 공급이 막히면서 원유 품귀 현상이 빚어졌던 것이다. 러시아는 자국산 원유에 대한 제재가 내려지자 이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덤핑 전략을 쓰기 시작했다. 러시아산 원유를 브렌트·서부 텍사스·두바이산보다 배럴 당 30달러 이상 싼값으로 내다 팔았다. 그러자 친러 성향의 나라들이 다투어 러시아산 원유를 매입, 에너지 관련 전체 수입이 도리어 증가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실제로 올 초 배럴당 76달러 하던 서부 텍사스유는 3월 초 123달러까지 치솟았다가 지금은 100달러 안팎에 거래된다. 국제시장 가격보다 30달러 더 싸게 팔아도 큰 손해를 보지 않는다는 얘기다.

러시아 모스크바 인근에 위치한 러시아 정유시설 전경으로 지난해 촬영한 사진. AP

러시아 모스크바 인근에 위치한 러시아 정유시설 전경으로 지난해 촬영한 사진. AP

미국의 제재 동참 요청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산 원유를 사 가는 큰 손은 러시아와 함께 브릭스(BRICS)로 불리는 브라질·인도·중국·남아공 등 신흥경제 국가들이다. 이중 특히 인도는 대놓고 러시아산을 대량으로 사들이고 있다. 실제로 요즘 인도는 하루 평균 74만 배럴씩을 구입하고 있는 데, 이는 지난해 3만8000배럴의 20배 가까운 규모다. 이로 인해 일각에서는 인도가 값싼 러시아산 원유를 사들인 뒤 이를 되파는 수법으로 돈을 벌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브라질 역시 러시아 제재를 무시하는 대표적인 나라다. 자이르 보우소나라 브라질 대통령은 지난 2월 미국의 공식적인 반대에도 불구, 러시아를 방문해 푸틴과 정상회담을 강행했을 정도다. 중국과 남아공도 물론 러시아산 원유를 구입하는 큰 손이다. 이런 분위기로 모스 호크스테인 미 에너지 안보 특사도 지난 9일 미 상원에 출석, "러시아가 전쟁 이전보다 원유·가스 판매로 더 많은 돈을 버느냐"는 질문에 "부정할 수 없다"고 답한 바 있다.

지난 2월 자이르 보우소나라 브라질 대통령은 미국의 자제 요청에도 불구, 러시아를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AP

지난 2월 자이르 보우소나라 브라질 대통령은 미국의 자제 요청에도 불구, 러시아를 방문해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다. AP

잘못된 학습효과
그렇다면 바이든 행정부는 왜 오판했을까? 이는 바이든 외교팀의 잘못된 학습 효과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바이든을 비롯해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안보보좌관 등이 과거 오바마 행정부 시설, 대이란 경제 제재를 설계하고 성공시킨 경험이 있어 이번에도 잘 될 거로 낙관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들은 오바마 행정부 시절인 2015년 서방의 경제 제재에 시달려온 이란과의 협상을 타결시켜 핵 개발 프로그램을 중단시킨 바 있다.
하지만 러시아 제재는 이란 때와는 크게 다르다. 핵심적인 차이는 이란 제재 때는 이 나라 석유를 사 가는 기업도 제재하는 '세컨더리 보이콧 (secondary boycott)'이 적용된 반면 이번에는 그런 처벌 규정이 없다. 누구든 제재 걱정 없이 러시아산 원유·가스를 살 수 있다는 얘기다.
이렇듯 구멍 뚫린 제재 탓에 러시아와 참여 거부 국가들은 손해를 입지 않거나 도리어 큰 이익을 보고 있다. 반면 미국과 제재 동참 국가들은 유가 폭등과 이에 따른 최악의 인플레 등 심각한 몸살을 앓고 있다.
실제로 미국의 경우 우크라이나 전쟁 전 갤런 당 1달러대였던 휘발윳값이 5달러 이상으로 치솟았다. 이에 따라 지난 5월 물가도 전년도보다 8.6%나 뛰었다. 1981년 이래 41년 만에 나타난 최악의 인플레인 셈이다. 기록적인 인플레는 바이든의 인기에 결정타를 안겼다. 취임 500일을 기준으로 최악의 대통령으로 꼽히던 트럼프의 지지율 41.5%보다도 낮은 40.2%를 기록할 정도다. 이대로면 11월 예정된 중간선거에서 민주당이 대패하는 것은 물론 2년 뒤 재선 출마는 꿈도 못 꿀 지경이다.

지난해 6월 촬영한 인도 구자라트주의 정유시설 모습. 인도는 요즘 전년도 보다 20배 가까운 하루 평균 74만 배럴의 원유를 러시아로부터 구입하고 있다. AP

지난해 6월 촬영한 인도 구자라트주의 정유시설 모습. 인도는 요즘 전년도 보다 20배 가까운 하루 평균 74만 배럴의 원유를 러시아로부터 구입하고 있다. AP

중국 제재 풀기 나서 
이처럼 코너에 몰린 바이든은 인기 만회를 위해 인플레 잡기에 필사적이다. 심지어 중국 견제를 위해 트럼프 때 채택됐던 고관세 장벽도 낮추려 한다.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높은 관세는 시진핑 정권에 별다른 타격을 주지도 못하면서 인플레만 유발한다는 회의론을 받아들인 결과다.
아울러 바이든은 다음 달 중순 인권 탄압 문제로 사이가 불편해진 사우디아라비아까지 방문해 원유 증산을 요청할 계획이다. 바이든은 사우디 실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를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 사건의 배후로 지목하며 "국제사회의 왕따로 만들겠다"고 비난한 바 있다.
바이든은 국내적으로도 인플레 잡기에 필사적이다. 그는 푸틴을 유가 상승의 주범으로 몰아세우다 최근에는 엑손 등 미국의 대형 석유회사를 겨냥, "하느님보다 더 많은 돈을 벌면서도 높은 유가를 유지하기 위해 생산을 늘리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바이든의 노력이 쉽게 성공할 거로 보는 시각은 많지 않다. 무엇보다 섣부른 러시아 제재로 유가는 뛰었지만 정작 푸틴 정권은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기 때문이다. 푸틴이 앞으로도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속 수행할 자금 능력이 있다는 얘기다. 반면 바이든은 갈수록 전쟁을 빨리 끝내라는 압력에 시달릴 공산이 크다.  이렇게 되면 우크라이나 전쟁이 러시아에 유리하게 마무리될 가능성이 커진다.

삼성전자가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건설 중인 170억 달러(약 21조원) 규모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 공사 현장 사진으로 지난 5월 공개됐다. 연합뉴스

삼성전자가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건설 중인 170억 달러(약 21조원) 규모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 공사 현장 사진으로 지난 5월 공개됐다. 연합뉴스

한미관계 영향
바이든 정권의 오판으로 전 세계, 특히 미국의 인플레가 심각해지면 한국엔 어떤 영향을 줄까? 먼저 바이든 정권은 중간 선거를 앞두고 지지율 만회를 위한 각종 정책을 시행하려 할 것이고, 이 과정에서 동맹국인 한국의 도움을 요청할 가능성이 있다. 최근에 삼성·현대가 그랬듯이 한국 대기업의 미국 내 대규모 투자를 부탁할 수 있다. 이를 통해 미국의 실업 문제를 해결했다고 선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미국은 대중 관세는 낮추려 할지라도 국내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중국과의 갈등을 더 부추길 공산도 있다.
무릇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어야 너그러울 수 있는 법이다. 인플레에 시달리는 바이든 정권으로서는 당장 발등의 불을 끄기 위해 한국을 위시한 동맹국들에 쉽지 않은 요구를 들어달라고 압박할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