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네·카·쿠·배·당’으로 불리는 디지털 플랫폼 기업들과 마주 앉았다. 플랫폼 운영의 공정성을 의심받고 있는 이들 기업이 자율적으로 불공정 거래를 규제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무슨 일이야
이종호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정통부) 장관은 22일 오전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네이버(최수연), 카카오(남궁훈), 쿠팡(박대준 각자대표), 배민(김범준), 당근마켓(김재현 공동대표) 등 일명 ‘네·카·쿠·배·당’ 수장을 직접 만나 간담회를 가졌다. 이날 과기정통부는 디지털 플랫폼 정책포럼도 별도로 열어 민·관·학계가 모여 자율 규제 논의를 시작한다고도 밝혔다.
이게 왜 중요해
‘윤석열호’의 플랫폼 자율규제 논의가 첫 삽을 떴다. 윤석열 정부는 플랫폼 기업을 법으로 규제하기보단 최소·자율 규제에 맡긴다는 기조다. 이날 이종호 장관은 “플랫폼 정책은 각국이 처한 상황 별로 다르게 추진돼야 한다”며 “갈수록 치열해지는 글로벌 플랫폼 시장을 감안할 때 디지털 플랫폼 정책은 혁신과 공정의 가치를 포괄해야 하고, 규제의 방식도 혁신적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석열 정부가 입법 규제 대신 자율 규제로 선회하면서 문재인 정부가 추진했던 ‘온라인플랫폼 공정화법(이하 온플법)’은 사실상 추진 동력을 잃게 됐다.
온라인 플랫폼 공정화법이 뭔데?
일정 규모 이상의 국내외 플랫폼 기업들의 불공정 거래 금지 행위를 법령에 명시하고, 위반시 규제하는 내용의 제정안이다. 국회에 계류중인 제정안에 따르면, 거래액 1조원이 넘거나 매출이 1000억원 이상인 네·카·배·쿠 같은 대형 플랫폼 기업이 대상이다. 이들이 검색 알고리즘을 조작·변경해 자사상품을 우대하거나 과도한 수수료를 부과하는 등 플랫폼에 입점한 중소상공인에 불공정 거래를 할 수 없도록, 상품 노출 순서나 수수료 부과 기준 등을 담은 계약서를 써야 한다는 게 골자다. 참여연대·소상공인업계 등은 온플법을 통해 플랫폼 중개거래 시장의 규제 공백을 해소할 수 있다며 찬성했다. 반면, 한국인터넷기업협회·코리아스타트업포럼 등 플랫폼 업계는 부작용을 우려하며 반대해왔다.
그러나 온플법은 1년 넘게 국회에서 표류했다. 문재인 정부 당시 공정거래위원회·방송통신위원회가 규제 주도권을 두고 기싸움을 벌이면서 입법 시기를 놓친 측면이 있다. 이후 21대 대선이 임박하면서 입법 논의가 사실상 중단됐다.
그럼 자율규제는 어떻게?
규제의 틀을 만드는 데 기업·소비자·이해관계자가 직접 참여한다는 게 자율규제의 핵심. 다만, 참고할 만한 해외 사례도 없어 아직 밑그림을 그리는 단계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민간이 참여해 현실적으로 지킬 수 있는 자율규제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현재로선 구체적인 자율규제 방안은 업계·전문가가 참여하는 ‘디지털 플랫폼 정책포럼’, 유관부처들이 모인 범부처 ‘디지털 플랫폼 정책협의체’에서 논의될 예정이다. 업종·분야별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규제의 각론을 고민해 오면, 범부처 협의체가 총론을 본다는 구상. 홍진배 과기정통부 네트워크정책실장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자율규제도 완전자율부터 공동규제까지 단계가 다양하다. 플랫폼도 영역별로 모델이나 접근방법, (규제)수준이 다 다를 수 있다”고 말했다.
플랫폼 반응은
● “좋아요” : 기업들은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다. 이날 장관 간담회에 참석한 네이버 최수연 대표는 “정부가 플랫폼 기업들과 함께 자율규제 방안을 논의하는 것에 대해 환영한다”며 “책임지고 상생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쿠팡 박대준 각자대표도 “기업 간 거래(B2B) 중심으로만 책임을 강조하면 소비자가 소외될 수 있다”며 “서비스와 소비자 차원에서 도움이 되는 방향도 염두에 놓고 진행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재현 당근마켓 공동대표는 “자율규제를 통해 개인간거래(C2C)라는 새로운 산업환경에 부합하는 기준과 질서를 만들어가겠다”고 덧붙였다. 메타버스를 미래 먹거리로 점찍은 카카오의 남궁훈 대표도 “산업 진흥, 소비자 후생 증진을 충분히 고려하면 좋겠다”며 “메타버스 규제 얘기 나오는데, 잘 살펴달라”고 말했다. 김범준 우아한형제들 대표는“기업들이 자발적으로 노력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만큼, 적극 협력하겠다”고 말했다.
● “걱정되는데...” : 좋기만 한 건 아니다. 자리에 참석한 기업 인사는 “범부처가 참여하기 때문에 잘못하면 (자율 규제가) 오히려 더 촘촘한 감시수단이 될 수도 있어 기업 입장에선 더 부담”이라고 말했다. 디지털 플랫폼 정책포럼의 공동위원장을 맡은 이원우 서울대 교수는 “디지털 생태계 특성상 사전규제가 쉽지 않다”며 “기업·소비자·이해관계자 등의 논의를 통해 기준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과기정통부 관계자는 “자율 규제라 해도, 그 수준은 입법 규제와 다르지 않을 수 있다”며 “데이터·배달·중개 등 플랫폼도 업종이 다양한데 (자율 규제는) 레벨별로 접근해 (규제 적용이) 유연하다는 장점이 있고, 규제 효과도 더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는
‘온플법’의 불씨가 아직 남아 있다. 장관과 네·카·쿠·배·당 대표들의 간담회 전날인 21일 더불어민주당·정의당 소속 의원들은 토론회를 공동으로 열고, 플랫폼 독점 규제를 위한 미국·EU의 입법 쟁점 등을 공유했다. 송갑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서면 인사말에서 “윤석열 정부의 원칙 없는 자율규제 기조는 플랫폼 기업의 관행적인 독점과 갑질에 면죄부를 주겠다는 것”이라며 온플법을 조속히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