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1676~1759 )의 그림 '일가정(一架亭)', 표암 강세황(1713~1791)의 채색 소품 화첩 『수채(受彩)』, 단원 김홍도(1745~1806)의 석매도(石梅圖), 추사 김정희(1786~1856)의 다양한 글씨···.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은 작품이 이렇게나 많았던가.
서울 백악미술관, '수류화개' #개인 소장가들 작품 90여 점 #표암 화첩부터 추사 글씨까지 #"고미술 더 가까이 다가와야"
최근 서울 인사동 백악미술관을 찾았던 이들은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동안 쉽게 볼 수 없던 고미술 작품이 한자리에 나왔기 때문이다. 지난 18일 개막한 '수류화개(水流花開)' 전이 화제다. 1, 2층 전시장에서 조선시대 내로라하는 서화가(書畫家)들의 그림과 글씨, 화첩, 서책 등 90여 점을 제법 큰 규모로 선보이고 있다. 표암, 겸재, 단원의 그림을 비롯해 하나하나 거장들의 작품인데, 그동안 박물관이나 교과서에서 접해온 그림과 글씨가 아니다. 오랫동안 개인 소장가들이 간직해온 희귀작들이다.
예를 들면, 강세황의 채색화 소품 화첩『수채(受彩)』는 십수 년 전에 일본 경매를 통해 국내로 들어왔지만, 그동안 국내서 공식적으로 소개된 적이 없다. 이번이 첫 공개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겸재의 '일가정', 단원의 '석매도' 역시 일반에 공개된 기록이 거의 없다. 이전에 국립중앙박물관 등 소수 전시에서 일부가 전시됐던 임전 조정규( 1791~?) 금강산도는 이번에 8폭 전체가 다 나왔다.
이번 전시는 한국미술정보개발원(대표 윤철규)이 주최한 애호가 전시다. 개인 소장가들이 "과거 인사동에서 고미술 애호가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듯이 일반 관람객이 고미술을 가까이 접할 기회를 만들어보자"는 데 뜻을 모으며 작품을 꺼내놓은 것이다. 그게 90점이 넘었다. 이번에 작품을 내놓은 소장가는 총 7명으로, 국내 유명화가 3명과 서예가 등 면면이 다양하다.
1층 전시장엔 표암과 단원 이외에도 시산 유운홍(1797~1859)의 산수, 해부 변지순(1780 이전~1831 이후)의 '노송도(老松圖)와 우죽도(雨竹圖)가 나왔고, 2층 전시장엔 조선 중기 대학자 퇴계 이황(1501~1570)부터 조선 중기 명필가 황기로(1521~1567 ), 후기 이광사(1705 ~ 1777)의 글씨도 나왔다.
강세황의 『수채(受彩)』
이번 전시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표암의 글씨와 그림(1층), 추사의 다양한 글씨(2층)다. 표암이 중국 북송의 서예가 미불(米芾) 글씨를 평하며 쓴 글부터 서간첩(간찰 7통 수록), 매죽도와 산수도 등 작은 그림들이다.
『수채(受彩)』화첩엔 표암이 소재와 채색에 있어서 다양한 시도를 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겼다. 표암은 처음에 남종문인화의 모방작을 그리다가 후기에 음영법 등 서양의 수채기법을 산수화에 접목하며 자신의 작품세계를 확립했다. 전시를 기획한 윤철규 한국미술정보개발원 대표는 "이 화첩은 일제강점기 이왕직 장관을 한 민병석(1858~1940)이 소장했던 것"이라며 "약 십수 년 전 일본 경매에서 사들여 국내로 들어온 뒤 일반에 공개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괴석도(怪石圖)와 산수
괴석과 대나무, 난초를 그린 그림도 다양하다. 괴석도는 표암이 그린 것부터 황산 김유근(1785~1840), 애춘 신명연(1808~1886). 심전 안중식(1861~1919), 학석 유재소(1829~1911)가 그린 것이 나란히 걸렸다. 탄은 이정(1554~1626), 자하 신위(1769~1847), 해강 김규진(1864~1933)의 묵죽도,석파 이하응(1820~1898) 과 운미 민영익(1860~1914) 의 묵란도도 볼 만하다.
전시를 본 유홍준 명지대 명예교수(전 문화재청장)는 "그동안 고미술 애호가들이 볼 만한 전시가 거의 없었는데 모처럼 좋은 고서화를 한데 모아 말 그대로 고미술의 향연이 열렸다"고 말했다. 유 명예교수는 이어 "보물급은 아니어도 추사 글씨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과 더불어 단원의 석매도, 김유근의 괴석도, 석당 이유신(미상, 18세기)의 '창옥병(蒼玉屛· 포천 지역 기암 진경산수)', 시산 유운홍(1797~1859 )의 산수가 인특히 좋았다"고 덧붙였다.
2층엔 추사의 예·행서 작품을 비롯해 산천 김명희(1788~1857), 금미 김상희(1794~1861) 추사 삼형제의 글씨가 나란히 걸렸다. 또 추사 이전에 유명했던 명필가 이광사(1705~1777), 이광사보다 앞선 시기의 석봉 한호(1543~1605)과 퇴계의 글씨를 볼 수 있다.
18일 전시를 관람한 초정 권창륜(79) 서예가는 "추사의 글씨 하나하나엔 깐깐하면서 내공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 그대로 들여다보인다"며 "추사의 다양한 글씨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좋았다"고 소감을 말했다.
이동국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수석 큐레이터는 "추사의 쌍폭 대련 등 기존에 공개된 몇 작품을 제외하곤 이번 전시에 새로운 자료들이 쏟아져 나왔다"며 "황기로, 양사언, 백광훈, 이산해 등 기라성같은 조선 전기 명필가들의 글씨를 모아놓은 서첩(명인서첩)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 큐레이터는 이어 "작품을 상세히 해설해주는 자료가 없는 게 매우 아쉬웠다"면서도 "근 10여년 만에 조선 글씨와 그림을 동시에 보여준 전시로, 우리 미술이 어디로 가야 할지 깨달음을 주는 자리였다"고 덧붙였다. 전시는 27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