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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달의 예술

소리를 살피는 특별한 음악가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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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

지난 16일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의 음악회가 서울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열렸다. 시각장애를 지닌 전통 국악 연주자로 구성된 이 단체는 2011년 창단되어 국내외에서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음악사에서 베토벤의 청각 장애가 종종 거론되지만 ‘앞을 보지 못하는 음악가’에 대해서는 거의 논의되지 않고 있기에, 이들의 연주는 그간 음악회에서 느끼지 못했던 매우 새로운 경험을 안겨주었다.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의 기원은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종대왕은 “시각장애인 악사는 앞을 볼 수 없어도 소리를 살필 수 있기 때문에 세상에 버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하면서, 맹인이 궁중에서 연주할 수 있게 하였고, 이들을 ‘관현맹인’이라 불렀다. 세종대왕의 애민(愛民) 정신이 반영된 관현맹인의 전통은 조선시대부터 면면히 이어졌지만 일제강점기에 끊어졌고, 2011년 국립국악원 개원 60주년 기념사업으로 시각장애인 전통 음악가를 발굴하고 키우고자 이 예술단을 창단했다.

관현맹인전통예술단 11돌 무대
세종의 애민정신 잇는 국악향연
‘음악은 모두를 위한 것’ 깨달아

시각장애 국악인이 모인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이 지난 16일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창단 11돌 기념공연을 하고 있다. [사진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

시각장애 국악인이 모인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이 지난 16일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창단 11돌 기념공연을 하고 있다. [사진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

이번 연주회는 창단 11주년을 기념하며 ‘발밤발밤’이라는 주제로 진행되었다. 발밤발밤은 ‘한 걸음씩 걸어 앞으로 나아간다’는 순우리말로, 지난 11년간 이 단체의 뜻깊은 여정을 상징하고 있다. 단원 전체가 함께한 첫 곡 ‘만파정식지곡’은 정악의 여유로운 멋을 차분하게 보여주었고, 이어 이날치의 노래로 유명한 ‘수궁가’의 한 대목 ‘범 내려온다’가 김지연의 소리로 화려하게 펼쳐졌다.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육지의 장관을 경험하는 자라의 유머러스한 반응, 특히 호랑이를 처음 본 순간의 놀라움을 김지연은 판소리의 걸쭉한 흥과 멋으로 유감없이 표현했다. 앞을 보는 스승 변종혁과 시각장애인 제자 양하은이 함께 연주한 ‘해금 산조’는 단계적으로 변화되는 산조의 장단을 끓어질 듯한 가냘픈 사운드로 멋스럽게 들려주었고, 국가무형문화재 이수자이자 온나라국악경연대회 대통령상 수상자 이현아의 여창가곡 ‘우락’은 풍류의 멋을 더했다.

전통적 음악을 들려준 1부와 달리 2부에서 분위기는 현대적으로 바뀌었다. 흰색 양복을 산뜻하게 입고 연주한 관현합주 ‘산책- 나 그리고 우리가 보는 소리’는 작곡가 박경훈이 이번 공연을 위해 만든 작품이다. 해금·피리·25현 가야금·거문고·장구 등 전통 악기가 새로운 어법으로 구현되어 경쾌한 분위기로 바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힐링의 시간을 선사해주었다. 경기민요 ‘방아타령’ 선율을 활용한 ‘해금 협주곡’에 이어, 모든 단원이 장구·꽹과리·북·징 그리고 태평소 등을 함께 연주한 타악합주 ‘천지인’이 마지막을 장식했다. 만물을 구성한 하늘과 땅, 사람이 하나를 이루어 화합하고 발전하고자 하는 염원을 폭발적인 타악 사운드로 구현했다.

“앞을 못 보아도 소리를 살필 수 있다”는 세종대왕의 깊은 성찰을 느낄 수 있었던 이번 공연은 많은 분들이 노력한 결실이다. 10년간 이 예술단을 위해 헌신했던 변종혁 예술감독은 “그간 수많은 국내외 공연에서 예술적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며 “언제나 밝게 웃으며 행복한 마음으로 쉼 없이 연습해온 단원들이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이 단체의 자문위원이자 이번 연주회에서 사회를 맡은 김희선 국민대 교수는 “이 예술단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보여주며, 예술의 의미와 가치를 오늘 우리의 음악으로 실천하고 있다”고 북돋웠다.

이번 관현맹인전통예술단의 공연은 기존 음악회에서 느낄 수 없었던 큰마음의 울림을 주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음악공연에 대한 기존의 인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점일 것이다. 연주자들이 무대에 등장할 때 스태프들이 동행하는 모습도 놀라웠다. 시각장애인에게는 단지 무대에 등장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임을 깨닫게 해주는 순간이었다. 무대에 자리를 잡고 앉은 연주자들은 모두 악보 없이 연주했는데, 비단 연주할 때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곡을 연습할 때도 모두 일반 악보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 떠올랐다.

이와 함께 오늘의 공연에 이르기까지 연주자들이 겪어야 했던 어려움과 치열한 노력이 느껴져 마음이 뭉클했다. 또한 청중 중에 시각장애인분들이 있었는데, 이들 역시 안내를 받아 좌석에 앉았고, 그중에는 안내견을 동반한 분도 있었다. 음악회 내내 조용하게 자리를 지킨 안내견도 이번 공연의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음악은 모두를 위한 것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를.’ 이번 공연을 통해 얻은 값진 깨달음이다.

오희숙 음악학자·서울대 음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