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21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국민의힘 상임고문단과 오찬을 함께했다. 취임 이후 처음으로, 참석자들은 “문재인 정부에서 잘하지 못한 것들을 이제부터라도 윤 대통령이 제대로 챙겨달라”는 취지의 의견을 공통으로 냈다.
이날 오찬은 청사 5층 대접견실에서 진행됐다. 윤 대통령은 상임고문단을 향해 90도로 허리를 굽혀 정중히 인사한 뒤 “오랜 세월 동안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우리 당'을 지켜본 선배들 덕분에 어렵지만 다시 정부 권력을 회수해 와서 지금 경제위기 국면을 맞아 힘겹게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오찬에는 황 전 부총리와 김무성 전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 대표 등 국민의힘 상임고문 32명 중 20명이 참석했다. 도시락 오찬으로 진행된 비공개 식사에서 참석자들이 나이·경력순으로 한 사람씩 돌아가며 윤 대통령에게 국정 운영에 대한 조언을 전했다.
첫 발언자였던 신경식 전 헌정회장은 “윤 대통령이 당 출신이 아니라 당과는 선거 때 같이 하는 것으로만 생각할 줄 알았는데 ‘우리 당’이라고 해 줘서 당원의 한 사람으로서 고맙다”고 윤 대통령의 모두발언에 화답했다. 그는 이어 “과거에는 대통령이 당 총재를 겸하니 총재 비서실장을 두고, 청와대 수석 회의에도 참석시키고 했다”면서 “지금 그렇게 할 수는 없지만 정부조직개편을 통해 정무장관을 부활할 필요가 있다”는 제안을 했다고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밝혔다. 당과의 활발한 소통을 당부한 발언이다.
참석자들에 따르면 정갑윤 전 국회부의장도 “이진복 정무수석 등 대통령 비서실이 직접 나서 물밑에서 민주당을 설득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고 한다. 원 구성 협상 지연 등으로 개점휴업 상태인 국회와의 유기적 소통을 대통령실 차원에서 상시 진행할 필요가 있다는 조언이다.
황우여 전 부총리는 오찬 후 중앙일보 통화에서 “나까지는 마이크가 돌아오지 않아 평소 생각 몇 가지를 쪽지에 써서 전했는데, 그중 하나는 ‘30대 장관을 키우시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30대 지도자로서 혼자 뛰려니 너무 힘들어 보인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YS 키즈’를 키웠듯, 윤 대통령이 30대 지도자군을 지금부터 만들면 그들이 경쟁과 균형을 거쳐 장래에 나라에 좋은 일을 할 수 있다”는 의견을 쪽지에 써 이진복 수석에게 건넸다는 것이다.
외교·안보·역사 분야에도 원로들의 제언이 집중됐다. 1987년 6·10 민주항쟁 때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던 김용갑 전 의원은 통화에서 “(6·10 항쟁의 결과물인) ‘6·29 민주화선언’이라는 표현 자체가 문재인 정권 때 사라져버렸다”며 “윤 대통령이 마침 대선 출마 선언식을 지난해 6월 29일에 윤봉길 기념관에서 했기에, 여야 합의로 현행 헌법을 마련한 6·29 선언의 의미를 잘 새겨달라고 했다”고 밝혔다.
주일대사를 지낸 유흥수 전 의원은 “윤 대통령 당선 이후 한일관계 회복에 대한 일본 측 기대가 크다”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경제’를, 김대중 전 대통령은 ‘문화’를 매개로 대일관계를 텄는데 윤 대통령도 한일관계의 조속한 정상화에 앞장서 주기 바란다”는 의견을 냈다고 한다.
영부인 활동, 제2부속실 설치 문제도 거론됐다. 한 참석자는 "현재 김건희 여사의 위치나 역할이 확립돼 있지 않은데 전담팀을 만들든 제2부속실을 만들든 확실하게 해두는 게 좋겠다"는 취지의 의견을 제시했다고 한다. 또 국회 여성가족위원장을 지낸 문희 전 의원은 “한국의 저출산 문제가 나라의 존립을 위협하고 있다”며 “김 여사가 앞장서서 인구문제에 관심을 갖고 역할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문 전 의원은 중앙일보 통화에서 “인구문제는 반려동물 문제보다 훨씬 중요하다”면서 “문재인 정권 때 김정숙 여사에게도 같은 요청을 했는데 반응이 실망스러웠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경제위기 국면에서 수석비서관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소신 있는 안보관을 대통령이 계속 보여줄 필요가 있다”는 등의 제언이 나왔다고 한다. 윤 대통령은 말을 아끼고, 주로 듣는 데 집중했다. 한 참석자는 “대통령이 식사 도중 박수을 치며 공감하고 경청하는 장면도 있었다”고 전했다.
윤 대통령이 모두발언 때 “과거 청와대 근무하신 분들도 많이 계신데, 용산에 와 보시니까 어떠십니까”라며 “(청와대를) 다시 한번 상세하게 돌아보니 ‘아 거기 그냥 근무할걸’, 용산으로 간다고 한 게 좀 잘못했나 싶기도 하다”고 말한 대목에서는 좌중의 웃음이 터졌다. 이날 오찬에는 김대기 비서실장, 김성한 안보실장 등 대통령실 참모 10여명이 배석했다.
상임고문단 참석자 명단은 권해옥·김동욱·김무성·김영구·김용갑·김종하·나오연·목요상·문희·신경식·유준상·유흥수·이상배·이연숙·이윤성·이해구·정갑윤·정재문·최병국·황우여(가나다순) 전 의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