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귀 먹을까봐 매년 이명 검사 받아요.”
집회·시위에 주로 투입되는 경찰관들의 하소연이다. 실제로 이들에게 이명(耳鳴·귀울림 증상)은 직업병으로 인식되고 있다. 집회 현장에서 확성기나 앰프가 뿜어내는 큰 소음에 자주 노출돼 나타난 부작용이다. 언제부터인가 집회·시위의 현장은 ‘소음공장’이 됐다. 현장의 경찰관들은 매년 소음에 따른 순음 청력 검사와 고막 운동성 검사를 매년 받는다. 검사 비용은 국가에서 대준다.
게다가 소음엔 모욕과 혐오가 난무한다. 확성기를 통해 나오는 욕설과 비방, 근거 없는 주장 등이 고스란히 경찰관과 시민들에게 전해진다. 서울의 한 경찰서 정보과 소속의 팀장급 경찰관은 “온몸으로 폭탄을 받아낼 정도로 ‘화’를 받아내는 것 같다. 우리끼리는 서로를 ‘감정노동자’라고 부른다”고 했다.
이명이 경찰관의 직업병이 될 정도로 소음이 익숙해진 현장 상황을 최근 일반 국민도 절감했다. 전·현직 대통령 집 앞에서 ‘개XX’ 등의 욕설이 난무하는 시위 때문이다. 한 경찰관은 “VIP 집이 이 정도인데 하물며 다른 집회 현장은 어떻겠나”라고 한국 사회 집회의 현주소를 지적했다. 한때 “집회의 국가”(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라는 표현으로 시민사회의 성숙도를 상징했던 집회·시위가 이젠 명예보다는 오명으로 기억될 판이다. 지금의 집회에서 5·18 민주화운동과 6월 항쟁, 광화문 촛불 집회의 정신을 찾기는 어렵다. “자부심은 사라지고 부끄러움만 남았다”는 지적에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있다.
소음·막말로 고통을 주다…요즘 시위 방식
“‘쇠파이프’로 상징되던 신체적 과격 시위는 많이 사라졌다. 그러나, 소음으로 정신적 고통을 주는 폭력으로 변질됐다.”
일선 경비 경찰관의 말은 최근 집회·시위의 양상을 잘 설명하고 있다. 소수 인원만으로도 이목을 집중시키기 쉽고 확성기 등 신기술을 갖춘 장비가 이를 도와준다. 대신, 인근 주민 등에게 소음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달된다. 윤석열 대통령이 사는 서울 서초구 아크로비스타 주민들은 “수험생들이 공부하고 있으니 조용한 시위를 부탁드린다”는 현수막을 최근 내걸기도 했다. 경위급 한 정보경찰은 “㏈(데시벨) 제한이 있더라도 소리가 울려서 퍼지다 보니 근방 주민뿐 아니라 학교·관공서 등 근처에 있는 많은 이들이 힘들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전했다.
소음을 처벌하는 규정이 없는 건 아니다. 경찰은 10분간 발생한 소음 평균값을 재는 ‘등가소음도’와 순간 소음이 기준 ㏈(데시벨)을 넘으면 규제하는 ‘최고소음도’ 방식을 병행해 현장 소음을 측정한다. 시간과 장소에 따라 기준 ㏈이 달라지는데,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시행령에 따르면 주거 지역 내 주간에는 65이하 ㏈(등가소음도), 85이하 ㏈(최고소음도)을 넘기면 규제 대상이다. 최고소음도를 측정할 때는 1시간 내 시간·장소에 따라 3회 이상 75~95㏈을 넘는 소음이 발생하면 경찰이 필요한 조치를 할 수 있다. 그러나, 평균을 재서 제재를 가하기도, 소음이 발생했다는 증거를 제시하기도 쉽지 않다. 지난 14일 윤 대통령 집 근처에서 처음으로 열린 맞불 집회에서는 등가소음도가 65㏈이 나와 규정을 위반했지만, 별다른 처벌이나 제재는 없었다고 한다.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은 20일 기자간담회에서 “집회 소음 ㏈과 관련해 시민들이 불편을 호소하고 있어 법령 검토가 필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뛰는’ 경찰 위에 ‘나는’ 시위대?
집회 현장에서는 꼼수가 판친다. 노동조합의 집회 경험이 많다는 A씨는 “마지막에 발을 빼면 된다”는 ‘비법’을 들려줬다. 1시간 동안 3회 이상 기준을 초과하면 안 된다는 경찰 규정(최고소음도)에 대해 A씨는 “경찰이 ‘한 번만 더 하면 걸린다’고 알려주는데 마지막이 됐을 때 소리를 키우지 않는 방식으로 처벌을 피해 가면 된다”고 했다. 집회를 벌여본 적 있는 한 단체 관계자는 “걔네(경찰)들과 다른 지표가 있다. 규정 ㏈을 넘더라도 일정 수분 동안 소음을 지속 안 하면 넘어갈 수 있다”고 했다.
경찰관들 사이에서는 “일부 시위대는 전문가 수준”이라는 말도 나온다. 집회 대응 경험이 있는 한 경찰관은 “소리가 엄청 크게 들려도 소음 기준이 애초에 높게 설정돼 있다. 측정할 때 이런 부분을 시위대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타인의 고통에 너무 무감각”
최근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집회·시위에 예민해졌다는 50대 시민 김모씨는 “헌법이 보장하는 자유라지만, 이런 자유라면 반납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신도시 건설현장 인근에서 열린 양대 노총 시위로 소음 등에 고통받아 주민 반대 서명을 받았던 영종시민연합 명예회장 한정엽씨는 “어린아이와 교대 근무자들이 잠을 제때 자지 못하고 고통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한씨는 당시 주민 1500명에게 확성기 등을 이용한 소음 집회·시위를 막아달라는 서명운동에 나서기도 했다. “법이 완벽한 게 아니기 때문에 ‘법대로 하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사회가 타인 고통에 너무 무감각하다”는 게 한씨 말이다.
권위주의 시대 이후에도 집회·시위를 과도하게 제한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은 결과로 이어졌다. 경찰 살수차에 농민이 사망했고, 거대 차벽은 ‘명박산성’이라는 비아냥을 받았다. 다양한 갈등의 현장을 겪으며 우리 사회는 자유를 더 보장하는 쪽으로 발전해 왔다. 그러나, 그렇게 지킨 자유가 방종이 되거나, 극단적이고 과격한 정치색에 오염되는 집회와는 선을 그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갈등을 겪으며 사회 발전에 기여해온 집회·시위 문화가 이제는 달라질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아이들이 봐도 부끄럽지 않은 집회를”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은 “집회·시위 현장에 정치 이슈만 난무하면서 정작 중요한 민생 이슈는 가려지고 있다. 민생 목소리를 명확히 정부에 전달하는 선진국 방식으로 집회·시위 문화가 달라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극단적으로 양극화된 집회·시위 양상 속에서 과거와 같은 가치 지향성은 확실히 떨어졌다”며 “사회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고 균형점을 찾아 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수십 년간 한국 사회의 집회를 지켜본 한 경찰관의 지적은 그런 면에서 곱씹어 볼 만하다. “역사적으로 한국은 집회·시위의 자유가 보장되는 쪽으로 발전해왔다. 이제는 시위자들이 사회적 책임을 더 느껴야 할 때다. 아이들이 봐도 부끄럽지 않은 집회·시위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