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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 캐비닛, 盧 회의록, 文 안보 보고…또 대통령기록물 논란, 왜

중앙일보

입력

“이명박 대통령님, 기록 사본은 돌려드리겠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08년 제17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노무현 이임 대통령 내외와 인사하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2008년 제17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노무현 이임 대통령 내외와 인사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퇴임 직후인 2008년 7월 이명박 대통령에게 이렇게 시작하는 서신을 보냈다. 당시 이명박 정부는 노 전 대통령이 퇴임 당시 재임 시절 기록을 복사해 봉하마을 사저로 가져 간 사실을 공개하며 ‘불법 유출’이라고 비판했다. 반면 노 전 대통령 측은 “사본을 가져간 건 정당한 열람권 행사”라고 반박했다. 양측의 공방 끝에 노 전 대통령은 “내가 볼 수 있게 되어있는 나의 국정 기록을 내가 보는 것이 왜 그렇게 못마땅한가”라는 내용의 서신을 청와대에 보낸 뒤 기록물을 반납했다.

이 사건은 ‘대통령기록물’의 공개 여부와 법적 지위를 놓고 벌어진 최초의 공방이었다. 대통령기록물은 2007년 4월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제정으로 처음 법적 근거가 마련됐고, 같은 해 12월 대통령기록관이 출범하며 공식적으로 정부에서 관리되기 시작했다. 이후 취임한 대통령에 관한 대부분의 기록은 이곳에 사료로 저장됐다.

2008년 7월 18일 유출된 대통령기록물 회수에 나선 정진철 국가기록원장 ( 오른쪽 ) 과 직원들이 4시간여의 시간을 지난뒤 봉하마을 측과의 이견을 좁이지 못해 빈손으로 노무현 전대통령 사저를 나서고 있다.

2008년 7월 18일 유출된 대통령기록물 회수에 나선 정진철 국가기록원장 ( 오른쪽 ) 과 직원들이 4시간여의 시간을 지난뒤 봉하마을 측과의 이견을 좁이지 못해 빈손으로 노무현 전대통령 사저를 나서고 있다.

법에 따라 대통령기록물은 공개가 원칙이다. 그러나 군사ㆍ외교ㆍ안보나 대내외 경제정책에 관한 내용, 사생활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내용은 대통령이 열람을 제한하는 ‘보호기간(15년 이내)’을 설정할 수 있다. 이를 대통령 지정기록물이라고 한다. 대통령 지정기록물을 보호기간이 끝나기 전에 공개하려면 ▶국회 재적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의결이 이뤄지거나 ▶관할 고등법원장이 중요 증거라고 판단해 영장을 발부하거나 ▶대통령기록관 직원이 업무수행상 필요에 따라 대통령기록관장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대통령 지정기록물은 법 제정 후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공개 여부를 놓고 공방의 대상이 되고 있다. 2012년 대선 당시 새누리당(국민의힘의 전신)은 노 전 대통령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에서 ‘NLL 포기 발언’을 했다는 의혹을 제기했고, 이는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당시 회의록 수정 및 초본 삭제 여부를 둘러싼 ‘사초 폐기 논란’으로 이어졌다. 당시 청와대 실무진이 삭제한 회의록 초본이 대통령기록물인지 여부를 놓고 여야 공방 끝에 새누리당의 고발로 검찰이 국가기록원을 압수수색하는 등 수사에 들어갔다. 이후 2015년 법원은 “대화록 초본은 대통령 기록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2013년 11월 15일 당시 이진한 서울중앙지검 2차장검사가 서울 서초동 고등검찰청 기자실에서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폐기의혹 관련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검찰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이 사라진 것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시로 인한 '고의적 삭제'라고 결론 내리고 백종천 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과 조명균 전 통일외교안보정책비서관을 대통령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및 공용전자기록 등 손상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기로 했다.   [뉴스1]

2013년 11월 15일 당시 이진한 서울중앙지검 2차장검사가 서울 서초동 고등검찰청 기자실에서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폐기의혹 관련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검찰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이 사라진 것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시로 인한 '고의적 삭제'라고 결론 내리고 백종천 전 청와대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과 조명균 전 통일외교안보정책비서관을 대통령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및 공용전자기록 등 손상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기로 했다. [뉴스1]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인 2017년에는 전임 박근혜 정부가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이른바 ‘캐비닛 문건’을 둘러싼 대통령기록물 논쟁이 벌어졌다. 당시 청와대는 정무수석실 등에서 수천 건의 문건이 발견됐다며 일부 내용을 공개했는데, 이 가운데 세월호 보고일지 조작 문건 등이 있다고 발표했다. 이에 당시 야당(현 국민의힘)은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을 대통령기록물법 위반 혐의로 고발하며 반발했다. 그러나 청와대는 이후 이를 검찰에 수사 의뢰했고, 검찰은 대통령기록관을 압수수색해 확보한 자료를 근거로 김기춘 전 비서실장, 김장수ㆍ김관진 전 국가안보실장 등을 재판에 넘겼다.

16일 2년 만에 뒤집힌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의 조사 결과를 놓고서도 법조계와 정치권에선 결국 검찰이 법원으로부터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대통령 기록물을 열람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대통령 기록물로 지정된 청와대와 해경, 국가안보실 등의 보고 내용을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다수당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이 “안보해악”을 근거로 이에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대신 정부의 결정으로 공개가 가능한 정보인 ‘SI(특수정보)’ 등을 정부가 판단해 공개하고, 그 결과에 책임질 것을 주장하고 있다.

정치권에선 대통령기록물을 둘러싼 연이은 논란이 신구(新舊) 권력 갈등의 연장선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교수는 20일 통화에서 “윤석열 정부가 출범 초기 국정주도권을 잡기 위해 전임 정권에 대해 밀어붙이는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이같은 논란이 “향후 대통령들이 기록을 남기기 꺼리는 원인이 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이소연 전 국가기록원장은 20일 통화에서 “대통령기록물법을 만들 당시 공개조항을 넣은 건 과거 IMF위기를 반면교사로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라도 주요결정의 진상을 검토할 수 있는 역사적 증거를 만들자는 취지였다”며 “그러나 지금처럼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치적 공방의 대상이 된다면 어떤 대통령이 기록을 남기면서 업무를 하고 싶겠냐”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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