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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현곤 칼럼

경제위기 때 필요한 건 자유보다 따뜻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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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현곤 기자 중앙일보 편집인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네 명의 가족을 둔 그해 도시 근로자의 (한 달) 최저생계비는 8만3480원이었다. (우리) 삼남매의 수입 총액은 8만231원이었다. 그러나 보험료·국민저축·상조회비 등을 제하면 6만2351원밖에 안 됐다. 이 돈을 벌어오기 위해 우리는 (공장에서) 죽어라 일했고, 어머니는 늘 불안해했다.’ 1978년 발간한 조세희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일부다. 70년대 후반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나 힘겹게 살았고, 인간의 존엄성이 어떻게 훼손됐는지를 고발한 연작소설이다. 이런 대목도 있다. ‘우리의 생활은 전쟁과 같았다. 우리는 그 전쟁에서 날마다 지기만 했다.’

다른 한편에선 ‘복부인’의 부동산 투기가 기승을 부렸다. 부유층 과소비가 문제가 된 것도 그즈음이다. ‘난쏘공’ 삼남매가 죽어라 일해 손에 쥔 6만여원보다 훨씬 비싼 영어·수학 과외를 받는 중고생이 부지기수였다. 박정희 정부는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를 치적으로 내세웠다. 언제나 그렇듯, 평균치는 전체의 모습을 골고루 보여주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40년 주기 퍼펙트스톰 현실로 닥쳐
경제위기 때마다 빈부격차 심해져
양극화 막는 게 새 정부 최우선 과제
윤 대통령, 약자 편 서야 성공할 것

70년대 후반 빈부격차가 계속 커졌다. 산업화의 과실이 불평등하게 배분된 탓이 컸다. “70년대 후반 도시의 저임금 그룹이 예전보다 빨리 증가하는 동안 사회의 부는 소수에게 집중됐다.”(최장집 『한국의 노동운동과 국가』) 1, 2차 오일쇼크 여파로 전 세계에 불어닥친 스태그플레이션(저성장-고물가)도 양극화를 부채질했다. 물가상승률이 20%를 넘나들었다. 불황은 가난한 사람부터 공격한다. 동일방직, YH무역 등 노동 현장의 비극이 잇따랐다. 이는 부메랑이 돼 박정희 정부의 몰락을 재촉했다.

경제위기의 가장 큰 문제는 양극화를 확대한다는 점이다. 97년 외환위기 때도 그랬다. 통계에 잡힌 실업자만 200만 명에 육박했다. 32년 만에 최고치였다. 부실은행으로 전락한 제일은행에서 8000명 직원 중 3000명 넘게 정리해고됐다. 당시 폐쇄를 앞둔 테헤란로 지점 직원들이 만든 ‘눈물의 비디오’를 보면서 많은 사람이 함께 울었다. 외환위기를 고비로 국내에서도 시장과 경쟁 중심의 신자유주의가 대세를 이뤘다. 살아남은 사람은 더 많은 부를 쌓았고, 밀려난 사람은 사라져갔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양극화의 악몽을 다시 불렀다. 금융위기는 거대 투자은행(IB)의 탐욕과 오만이 빚은 사건이었다. 반성은커녕 모건스탠리와 골드만삭스 등은 구제금융으로 받은 돈을 직원 보너스로 뿌렸다. 지독한 도덕적 해이였다. 가난한 사람만 큰 피해를 본 셈이었다. ‘승자독식’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2011년 뉴욕 맨해튼에서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는 시위가 벌어졌다. 금융위기의 해법으로 내놓은 양적완화가 부자와 투기꾼의 배만 불리며 ‘1대99 사회’를 만들었다고 성토했다. 부의 편중과 시장·금융의 탐욕을 비판하며 신자유주의에 경종을 울린 사건이었다. 국내에서도 통화팽창의 후유증으로 지난 4~5년간 부동산값이 급등했다. 엄청난 자산 양극화를 초래했다. 상위 10%가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80년 32.7%에서 2019년 46.4%로 늘었다.

취약할 대로 취약해진 지금, 외환위기·금융위기보다 센 퍼펙트스톰(초대형 복합위기)이 닥쳤다. 1930년대 대공황, 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에 이은 ‘40년 주기 위기설’은 상상만 해도 소름 끼친다. 이번에도 불황은 사회의 약한 고리부터 공격할 것이다. 부자보다 서민,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자영업자, 정규직보다 비정규직, 집주인보다 세입자, 예금주보다 대출자가 더 큰 타격을 입게 마련이다. 물가가 5%, 10%씩 치솟으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 특히 생계비 비중이 높은 저소득층은 공포를 느낀다. 올 1분기 소득 하위 20% 가구는 가처분소득 월 84만원 중 35만원을 식비에 썼다(통계청). 취업준비생은 1000원이라도 싼 컵밥을 찾아다니고, 노인들은 무료급식소를 전전한다고 한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양극화가 더 심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이미 조짐이 있다. 지난해 4분기 월 소득 500만원 이상 가구의 가처분소득은 전년동기비 3.8% 증가했다. 반면에 100만원 미만 가구의 소득은 0.5% 감소했다. 금리 인상도 양극화를 부채질한다. 저소득층과 자영업자 등 취약계층은 늘어나는 이자를 감당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금리 인상을 머뭇거리면? 물가가 더 치솟아 취약계층부터 직격탄을 맞는다. 진퇴양난이다.

윤석열 정부의 성패는 경제위기에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렸다. 큰 고통을 피하기 어렵다. 급한 대로 양극화를 막는 데 집중해야 한다. 정책도 이를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 윤 대통령이 약자에 대한 따뜻함을 잊지 않고, 아픔을 같이 나누면 좋은 대통령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러지 않고 자유·시장·경쟁·성장·실용·효율 등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류의 ‘신자유주의 레코드판’을 틀면 민심이 등을 돌린다. 윤 대통령이 인생 책으로 꼽은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는 서구에선 수명을 다한 지 오래다. 윤 대통령이 흔들린다면? 우리는 이념장사와 포퓰리즘, 편가르기, 팬덤정치로 먹고사는 저질 정치꾼들의 세상을 다시 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