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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 압박, 마크롱 독선에 경고장…프랑스 총선 극좌·극우 돌풍

중앙일보

입력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지난 16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인근 도시 이르핀에 방문해 러시아의 폭격을 받은 건물 잔해를 보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AFP=연합뉴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지난 16일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인근 도시 이르핀에 방문해 러시아의 폭격을 받은 건물 잔해를 보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AFP=연합뉴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이끄는 중도 연합 '앙상블'(Ensemble!)이 19일(현지시간) 치러진 프랑스 하원 선거 결선투표에서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하며 ‘마크롱 2기’ 국정에 '빨간 불'이 켜졌다. 재선 성공 두 달 만이다. 프랑스 좌파 일간지 리베라시옹은 이번 선거 결과를 "마크롱 대통령에 대한 타격"이라고 평가했고, 프랑스 유력 경제 일간지 레제코(Les Echo)는 '지진'이 일어났다고 전했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대선에서 막 승리한 프랑스 대통령이 총선에서 과반을 차지하지 못한 것은 1988년 이후 처음이다.

20일 프랑스 내무부 집계 결과, 중도 연합 앙상블은 245석으로 가장 많은 의석수를 확보했지만, 과반(289석 이상) 달성엔 실패했다. 극좌 성향의 장 뤽 멜랑숑 굴복하지 않는 프랑스(LFI) 대표가 이끄는 좌파 연합 '뉘프'(Nupes)는 131석을 확보하며 제1 야당에 등극했다. 올해 대선 결선에서 마크롱 대통령과 겨뤘던 극우 마린 르펜 대표의 국민연합(RN) 당은 89명의 당선인을 배출했다. 마크롱 대통령과 정책 지향이 가장 가까운 보수 우파 공화당(LR)과 중도우파 동맹(UDI)는 각각 61석, 3석을 차지했다. 공산주의당은 22석을 얻었다.

프랑스 현지 매체들은 우크라이나 사태 등 외교에 집중하고 있는 마크롱 대통령이 치솟는 물가 등 산적한 국내 문제에 발목 잡혔다고 분석했다. 나아가 다수 좌파 유권자가 대선에서는 르펜의 당선을 막으려고 마크롱에게 표를 몰아줬지만, 이번 총선에서는 반대로 마크롱을 견제하고자 극우 정당을 지지하면서 이례적인 의회 구성이 나왔다고 전했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① 극우, 8석에서 89석으로…5년 만에 대약진

마린 르펜 국민연합(RN) 대표가 19일(현지시간) 저녁 RN이 의회에서 89석을 확보할 것으로 예측되자 웃음을 짓고 있다.[AFP=연합뉴스]

마린 르펜 국민연합(RN) 대표가 19일(현지시간) 저녁 RN이 의회에서 89석을 확보할 것으로 예측되자 웃음을 짓고 있다.[AFP=연합뉴스]

르펜 대표가 이끄는 RN은 극우 정당 역사상 최대 의석을 확보했다. 5공화국에 이르는 동안 프랑스에서 극우 정당이 15석(교섭단체 구성 가능) 이상 확보한 것은 1986년 르펜의 부친 장마리 르펜 대표 당시 35석 이후 처음이다. 2017년 선거에서 마린 르펜의 국민전선(National Front·국민연합 전신)은 8석 확보에 그쳤다. 현지 매체들은 RN의 약진에 대해 "5년 만에 의석수가 11배 불어났다"며 "큰 돌파구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파리마치에 따르면 르펜 대표는 19일 저녁 지지자들 앞에 서서 "불공정한 투표라는 난관을 극복하고 국민들은 강력한 의원들을 국회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며 "단호하고 책임감 있는 야당이 되겠다"고 소감을 발표했다.

선거를 앞둔 마지막 입소스 여론 조사에서 RN은 20~50석을 얻을 것으로 예측됐다. 폴 스미스 노팅엄대학 정치학 교수는 "여론조사기관을 포함해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결과"라고 말했다. 프랑스24는 마크롱 대통령에 대한 '반대' 여론이 RN의 동력이 됐으며, 르펜 대표는 이번 선거 결과를 바탕으로 더 큰 인기를 얻고 의회 내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으로 전망했다.

②분열 딛고 제1야당 된 좌파연합

멜랑숑 대표가 이끄는 뉘프는 정책적 차이를 극복하고 좌파 연합에 성공해 131석을 차지하는 이변을 일으켰다. 특히 LFI는 5년 전 17석 확보에 그쳤지만, 올해는 뉘프 연합 안에서 72석을 차지했다.

지난 19일(현지시간) 좌파 연합 뉘프를 이끄는 장 뤽 멜랑숑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 대표가 프랑스 파리에서 선거 유세를 하고 있다.[AFP=연합뉴스]

지난 19일(현지시간) 좌파 연합 뉘프를 이끄는 장 뤽 멜랑숑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 대표가 프랑스 파리에서 선거 유세를 하고 있다.[AFP=연합뉴스]

르몽드에 따르면 프랑스 좌파 정당들이 5년 전과 달리 선거를 앞두고 동맹을 결성한 게 주효했다. LFI와 사회당(PS)·녹색당(EELV)·프랑스공산당(PCF)이 선거구를 공유해 대표 후보를 냈다. 이와 별개인 좌파당은 13석 확보에 그쳤다. 멜랑숑 대표는 이날 지지자들에게 "마크롱이 완전한 패배를 겪었다"며 "좌파 연합은 프랑스의 역사적 반란과 혁명의 부흥의 새로운 얼굴"이라고 말했다. 이코노미스트지는 그동안 좀처럼 단합하지 못했던 좌파 연합이 마크롱 대통령에게 대항하기 위해 원자력 발전, 치안 문제 등의 정책적 차이를 제쳐놓고 연합했다고 전하며 "프랑스 좌파의 쿠데타"라고 평가했다.

멜랑숑 대표는 정년을 현재의 62세에서 60세로 하향하고, 최저임금 15% 인상, 생필품 가격 동결 등을 내세우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인플레이션이 가속화하는 가운데 생필품 가격을 동결하겠다는 멜랑숑 대표의 공약이 유권자들을 설득했다고 분석했다. 다만 과반 확보에는 실패하면서 "멜랑숑 총리"라는 선거 슬로건과 달리 총리직 요구의 동력을 잃었다는 분석이 나온다.

③ 프랑스 국정운영 키 쥔 공화당-중도우파

극좌와 극우 정당의 돌풍 가운데 정작 국정의 키를 쥔 곳은 공화당-중도우파 동맹(총 64석)으로 꼽힌다. 여당과 정책적 지향이 가장 가깝고 앙상블과 합치면 의회 과반을 차지한다. 현지 언론들은 엘리자베스 보른 총리가 당장 "내일부터 의회 과반수 구성 작업에 들어갈 것"이라고 한 발언의 대상도 공화당-중도우파 동맹이라고 내다본다.

엘리자베스 보른 프랑스 총리가 19일(현지시간) 여당의 과반 확보 실패가 확실시 되는 가운데 침통한 표정으로 기자회견장에서 발언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엘리자베스 보른 프랑스 총리가 19일(현지시간) 여당의 과반 확보 실패가 확실시 되는 가운데 침통한 표정으로 기자회견장에서 발언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일단 크리스티안 야콥 공화당 대표는 19일 저녁 "마크롱을 반대하고 있으며 야당으로서 역할을 하겠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법의 키를 쥐게 된 공화당-중도우파 동맹이 정책적 지향이 비슷한 여당의 국정 운행 파행의 책임을 져선 안 된다는 압박을 받게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프랑스24는 마크롱 대통령이 공화당-중도우파 동맹과의 타협을 위해 다소 '우클릭'을 할 것으로 전망했다.

밖으로 돌던 마크롱, 내부 개혁 드라이브에 제동 

프랑스 극우와 극좌 정당의 돌풍은 그 자체로 마크롱 대통령에게 일종의 경고장을 준 셈이 됐다. 최측근으로 꼽히는 아멜리에 드 몽샬린 유럽담당장관 등 내각 인사 3명의 낙선도 부담이다.

집권 1기 345석에 달하는 범여권 의석을 바탕으로 추진했던 연금 제도 개편, 정년 연장(62→65세), 감세 등 각종 개혁 드라이브가 의회의 협치 없이는 제동이 걸리게 됐다. 뉴욕타임스(NYT)는 마크롱 대통령이 임기 후 처음으로 권력을 의회로 이양하게 됐다고 평가했다. 그동안 "마크롱 대통령의 하향식 통치 방식은 의회를 소외시켰다"면서다. 프랑스 정치 역사가 장 가리그 작가는 "오히려 이번 선거 결과가 마크롱에게 축복이 될 수 있다"는 해석도 내놨다. 그는 "대통령은 협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며 “2017년부터 이어져 온 '자기 중심적 통치' 스타일과 그런 이미지를 변신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EPA=연합뉴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EPA=연합뉴스]

에티엔 올리옹 폴리테크니크 공대 교수(사회학)는 NYT 인터뷰에서 "중도우파 공화당이 마크롱 연정의 적임 파트너로 보인다"면서 "마크롱 대통령은 첫 임기보다 중도 동맹에게 훨씬 더 의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보른 총리는 "5공화국에서 이런(의회) 구성은 없었다. 이런 상황은 우리가 국내·외적으로 직면한 위험을 고려할 때 국내적 위험도 증가시킨다"고 말했다. 보른 총리는 불신임 투표로 총리직을 내놓게 될 가능성도 있다고 현지 매체들은 전했다.

프랑스 내무부에 따르면 결선 투표율은 약 46.2%(기권율 53.8%)로 2017년 당시(약 42%)보다는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록적으로 낮은 수치"(파리마치)라는 평가가 많다. 여론조사 결과 젊은 층의 투표율이 저조한 것으로 추정되면서, 젊은 층의 '정치에 대한 환멸'이 현실과 프랑스 정치 사이에 괴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고 NYT는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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