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중앙] 3일 만에 서울 잃은 국군·UN군…어떻게 6·25 전세 뒤집었나

중앙일보

입력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날짜에서 따와 6·25전쟁이라고도 하죠. 대한민국은 전쟁 초기 북한에 서울을 빼앗기고 부산까지 밀려나며 전세가 크게 기울었는데요. 1950년 9월 15일, 유엔(UN)군 사령관인 더글러스 A 맥아더(1880~1964) 장군이 지휘한 인천상륙작전(암호명: 크로마이트 작전·Operation Chromite)을 계기로 서울을 탈환, 전세가 역전됐죠. 이후 중공군이 개입하며 전황이 어지러워지고, 1953년 7월 27일 휴전하기까지 비등비등한 전투가 이어지죠. 다가오는 6·25전쟁일을 맞아 한반도의 운명을 뒤바꾼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 소중 학생기자단이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을 방문했습니다.

김도경(왼쪽)·노주하 학생기자가 인천 상륙작전기념관 자유수호의탑 앞에서 6·25전쟁 참전 장병의 넋을 기렸다.

김도경(왼쪽)·노주하 학생기자가 인천 상륙작전기념관 자유수호의탑 앞에서 6·25전쟁 참전 장병의 넋을 기렸다.

인천 연수구에 위치한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은 6·25전쟁 당시 나라를 구한 계기가 됐던 인천상륙작전의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고 보존하기 위해 1984년 개관한 전쟁사기념관입니다. 김선미 해설사를 만난 노주하 학생기자가 “6·25전쟁은 왜 일어났나요?”라고 물었어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민주주의와 공산주의 이념 대결이 생겼어요. 이른바 ‘냉전체제’라고 하죠. 김일성이 이끄는 북한은 소련(현재 러시아), 중공(중국 공산당)의 지원을 받으며 대한민국의 공산화라는 목적을 세웠어요. 이를 위해 1950년 6월 25일 새벽, 불법 기습 남침을 개시했죠.”

김도경(왼쪽)·노주하 학생기자가 김선미(맨 오른쪽)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인천상륙작전이 실행된 배경에 대해 알아봤다.

김도경(왼쪽)·노주하 학생기자가 김선미(맨 오른쪽)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인천상륙작전이 실행된 배경에 대해 알아봤다.

김 해설사가 며칠 만에 수도 서울을 빼앗겼는지 소중 학생기자단에게 질문했어요. 고민하던 김도경·노주하 학생기자는 “3일!”이라고 말했어요. “맞아요. 왜 3일 만에 서울이 북한군에게 넘어갔는지 군사력을 통해 알아볼까요. 당시 북한의 병력은 19만8380명, 남한은 10만5752명이었어요. 특히 항공기(전투기)는 북한이 226기, 남한이 22기였죠. 군사력에서 북한에게 밀릴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6월 27일, 유엔이 우리나라에 파병을 결정했고 7월 3일, 미군이 투입됐지만 국군과 미군은 북한군의 공격에 최후의 저지선이었던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납니다. 반격을 노리던 상황에서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하게 됐죠. 반대 의견이 많았지만 8월 28일 미국 합동참모본부가 결국 계획을 승인하며 9월 15일로 작전 실행을 확정합니다. 상륙부대로는 미 제10군단(군단장 알몬드 소장)을 창설하고, 미 해병대 제1사단(사단장 스미스 소장), 미 제7사단(사단장 바 소장), 국군해병연대(사령관 신현준 대령), 국군 제17연대(연대장 백인엽 대령) 등 총 병력 7만5000여 명을 편성했죠. 이들의 임무는 인천항 확보와 해안교두보 점령, 김포 비행장 확보, 한강 도하와 서울 탈환, 서울 근교 진지 점령이었습니다.

맥아더(앞줄 가운데)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며 서울을 탈환하고 6·25전쟁 전세를 역전시켰다. 중앙포토

맥아더(앞줄 가운데)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며 서울을 탈환하고 6·25전쟁 전세를 역전시켰다. 중앙포토

“인천상륙작전 실시에는 지리적으로 어려운 점이 있었어요. 인천 앞바다는 조수간만의 차가 평균 7m로, 간조 시 갯벌이 드러나 상륙할 수 있는 날이 한정적이었죠. 또 상륙해안 대부분이 4~5m 해벽(해안 보호를 위해 물가에 쌓은 돌담이나 벽)으로 이뤄져 사다리가 필요했어요. 인천항에 이르는 수로는 좁은 단일수로라서 큰 함정의 진입도 불가능했죠. 군을 지상에 투입시키기까지 시간이 지체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요.” 도경 학생기자가 “그런데도 왜 인천을 선택하게 됐는지” 궁금해했죠. “맥아더 장군은 인천이 서울로 접근할 수 있는 최단거리 항구이며, 서울을 탈환해 북한군에게 심리적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이유를 들며 많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작전 실행을 밀어붙였어요.”

인천상륙작전 실행 전 다양한 양동작전(기만전술 작전)도 사용됐어요. “대표적으로 경북 영덕군 장사리에서는 북한군 교란을 위해 학도병 772명이 장사상륙작전을 감행해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했죠. 학도병 139명이 전사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지만, 장사상륙작전으로 인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적인 수행이 가능했어요.” 2019년에 개봉한 영화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이 장사상륙작전을 소재로 한다는 말에, 소중 학생기자단은 한 번 보고 싶다고 입을 모았죠.

인천상륙작전에서 가장 먼저 상륙한 미국 해병대 모습. 해안 대부분이 높은 해벽이라 어려움이 컸다. 중앙포토

인천상륙작전에서 가장 먼저 상륙한 미국 해병대 모습. 해안 대부분이 높은 해벽이라 어려움이 컸다. 중앙포토

“당시 북한군은 어떤 상황이었나요?” 도경 학생기자가 질문했어요. “북한군의 전투력은 모두 낙동강 전선에 투입돼 인천과 서울에는 소수 병력만 남아 있는 상태였어요. 인천상륙작전은 북한군의 허를 찌르는 공격이 됐죠.” 당시 북한군의 인천 지역 병력은 약 2000여 명이었습니다. 국군과 미군은 상륙지역에 북한군을 고립시키기 위해 9월 4일부터 15일까지 공중폭격을 진행했고, 13일부터는 항공모함 4척, 구축함 6척, 순양함 5척이 인천만 어구에 들어서 월미도를 포격했어요.

9월 15일 오전 6시 33분, 미 제5해병연대 제3대대가 녹색해안(인천 중구 월미도)에 전차 9대와 함께 상륙했고, 오전 8시 월미도를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당시 미 해병대의 총 피해는 부상자 17명인데 반해 북한군 108명을 사살하고 136명을 포로로 생포했죠. 오후 4시 45분, 적색해안(인천 중구 북성동)과 청색해안(인천 미추홀구 용현동)에 상륙할 병력을 태운 함정들이 인천항에 접근했어요. 미 제5해병연대와 국군 해병대 제1연대 제33대대가 적색해안, 미 제1해병연대가 청색해안을 향해 진격해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우리 군이 어떻게 녹색·적색·청색해안에 상륙해 서울 수복의 길을 마련했는지 디오라마와 영상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우리 군이 어떻게 녹색·적색·청색해안에 상륙해 서울 수복의 길을 마련했는지 디오라마와 영상을 통해 알아볼 수 있다.

이 작전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약 4000여 명의 사상자를 냈고, 북한군은 1만4000여 명이 사살, 7000여 명이 포로가 됐죠. 주하 학생기자가 “인천상륙작전 얼마 뒤에 서울을 되찾게 되는지” 물어봤어요. “서울은 9월 28일 수복됐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은 서울을 수복하고 낙동강 전선에 몰려있던 북한군을 고립시켜 전세를 역전하게 만든 발판이었죠.”

김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소중 학생기자단은 당시 사용한 무기를 살펴봤어요. 군인들이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개인 휴대용 화기는 소총인데요. 대표적인 소총으로 북한군은 AK-47소총, 우리 군은 카빈소총을 사용했죠. AK-47소총은 소련군 제식소총(기본소총)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무기’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바 있죠. 카빈소총은 미군의 표준화기였으며 6·25전쟁에서 미 육군과 해병대, 국군의 제식소총으로 사용됐어요. 소중 학생기자단은 “이런 무서운 무기로 서로 싸웠을 생각을 하니까 정말 슬퍼요”라며 안타까워했어요.

6·25전쟁 시기 태극기에 주목한 소중 학생기자단. 문서·소품 등 인천상륙작전뿐 아니라 6·25전쟁 유물을 살펴볼 수 있다.

6·25전쟁 시기 태극기에 주목한 소중 학생기자단. 문서·소품 등 인천상륙작전뿐 아니라 6·25전쟁 유물을 살펴볼 수 있다.

포항전투에 참여한 중3 이우근 학도병의 편지엔 전쟁의 고통이 담겨 있다.

포항전투에 참여한 중3 이우근 학도병의 편지엔 전쟁의 고통이 담겨 있다.

무기 옆 벽에는 6·25전쟁 당시 포항전투에 참여했던 서울 동성중학교 3학년 이우근 학도병의 편지가 크게 걸려있었어요. “이 편지는 이우근 학도병이 어머니에게 보내려던 편지였어요. 어린 나이에 겪은 전쟁의 참혹함이 글에 담겨 있죠. 편지는 부쳐지지 못했고, 이 학도병이 전사한 다음 날 그의 주머니에서 발견됐어요.” 진지하게 편지를 천천히 읽은 도경·주하 학생기자는 “어린 학도병이 느꼈을 전쟁의 고통이 전해져요”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요”라고 소감을 말했죠.

6·25전쟁으로 인한 인명피해만 국군 약 62만 명, 유엔군 약 16만 명, 민간인 약 99만 명에 달합니다. 심지어 아직 휴전 중인 상황. 지금도 남북은 군사적으로 대치하며, 전쟁으로 피해를 본 이들의 상처는 여전히 남아있죠. 소중 학생기자단은 야외에 전시된 군사 장비를 둘러본 뒤 기념관 가장 높은 곳으로 향했어요. 이곳엔 참전 UN장병과 국군장병의 넋을 기리는 자유수호의탑이 있습니다. 6·25전쟁 전투부대 파견국(그리스·남아프리카공화국·네덜란드·뉴질랜드·룩셈부르크·미국·벨기에·에티오피아·영국·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콜롬비아·태국·터키·프랑스·필리핀)과 의료 지원국(노르웨이·덴마크·독일·스웨덴·이탈리아·인도)의 이름이 적혀있죠. 소중 학생기자단은 이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아 인사를 했습니다.

6·25전쟁과 인천상륙작전 때 사용된 군사 장비.

6·25전쟁과 인천상륙작전 때 사용된 군사 장비.

학생기자단 취재 후기

6·25전쟁의 아픔과 숭고한 희생을 기리는 마음을 가지고 인천상륙작전기념관에 갔습니다. 자세한 설명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이 왜 일어나고, 어떻게 진행됐는지 알 수 있었죠. 처음엔 북한의 공격에 밀렸지만,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을 탈환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당시 긴박했던 상황을 조금이나마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소중 친구들도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을 방문해 나라를 지키려고 희생한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떠올렸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김도경(인천 경명초 6) 학생기자

6월 호국보훈의 달 하면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6·25전쟁과 인천상륙작전입니다. 인천상륙작전기념관에서 해설사님의 설명을 듣고 그동안 교과서를 통해 알고 있었던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됐어요. 특히 중학생이었던 이우근 학도병이 쓴 편지를 읽으면서 그의 마음을 짐작해보니 가슴이 아팠죠. 제가 행복하게 대한민국에서 살 수 있도록 나라를 지켜주신 모든 분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노주하(인천 신정초 6) 학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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