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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과학기술기본계획, ‘기업가형 국가’ 혁신모델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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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명자 서울국제포럼 회장·한국과총 명예회장·전 환경부장관

김명자 서울국제포럼 회장·한국과총 명예회장·전 환경부장관

윤석열 정부의 과학기술 5개년 로드맵 초안이 다음 달에 나온다. 기조는 29개 과학기술 과제를 81개의 다른 국정과제와 연계시켜 범부처 실행력을 높이고, 외교·안보·국방·경제에 파급력이 큰 전략기술을 진흥시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컨트롤타워 관련 법 제정과 전략, 민관협동 전략기술 개발, 기술동맹 강화, 인력 확보 등이 추진된다. 연구개발(R&D)은 탄소중립, 디지털 전환, 고령사회 대비를 강조하고, 민간 주도 성장동력 창출을 위한 혁신 역량 제고, 질적 성과 중심의 R&D 수행체계, 투자 전략성이 강조된다.

과학기술기본계획(이하 계획)은 1960년대 경제개발계획의 일환으로 시작됐다가 2001년 과학기술기본법 제정으로 5년 단위 법정계획이 됐다. 최초 계획(2002~2006)은 국민의 정부 말에 수립되어 IT·BT(생명)·NT(나노)·ST(우주)·ET(환경)·CT(문화)의 6T를 미래유망 신기술로 선정했으나, 실행 기간이 짧았다. 환경부에서 일하던 필자는 ET를 강조했다. 참여정부의 제1차 계획(2003~2007)은 과학기술중심사회 구현과 제2 과학기술입국을 기치로 5대 영역과 10대 전략과제를 담았다. 이명박 정부의 제2차 계획(2008~2012)은 저탄소 녹색성장 깃발 아래 577 이니셔티브, 즉 2012년까지 GDP 대비 R&D 투자 5%, 7대 분야 육성, 7대 과학기술강국 도약을 제시했다.

윤 정부 과학기술 5개년 로드맵
역대 계획이 실패한 원인 살펴서
선도형 R&D로의 전환 해결해야
모험·도전의 기업가정신 키워야

박근혜 정부의 제3차 계획(2013~2017)은 창조경제를 앞세워 ‘하이(High) 5’ 전략으로 R&D 투자 확대, 전략기술 개발, 창의역량 강화, 신산업 창출, 과학기술 기반 일자리 확대를 선정했다. 문재인 정부의 제4차 계획(2018~2022)은 4대 전략 키워드로 미래도전 과학기술 역량, 혁신 생태계, 신산업·일자리, 과학기술이 만드는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내걸었다.

이들 계획을 통해 국가 R&D 기조를 추격형에서 선도형으로 바꾼다고 나선 지 20년이다. 그 성취로 GDP 대비 R&D 예산 5%에 근접해 세계 1, 2위가 됐다. 그러나 정부 R&D 과제 성공률이 98%(2017~2021)로 너무 높고 사업화 성공률은 43%로 너무 낮다. 요컨대 선도형 R&D로의 전환은 미해결이다. “고부가가치 성장동력을 발굴해 경쟁력과 역동성을 높인다. 과학기술혁신본부의 총괄조정으로 (중략) 범부처적으로 추진한다. 정부는 기초기반 기술 개발과 인력 양성을 지원하고 실용화 기술 개발과 시장 창출은 민간이 담당한다.” 이 내용은 부총리로 승격(2004)된 과학기술부가 17년 전에 발표한 ‘신과학기술행정체제 운영 1년의 성과’이다. 꼭 요즘 얘기처럼 들린다.

그동안 시도는 많았다. 총괄조정 기구의 부재를 해소한다며 새 조직도 만들었고, 규제권력 분산과 이동으로 매니지먼트 개선도 했고, 신정부 출범 때마다 ‘과학기술부’ 간판은 바뀌었다. 그 사이 공문서상에 나타난 대로라면 모든 게 풀렸을 터이다. 그런데 데자뷔다. 새로운 계획을 세울 때는 우선 역대 계획 실행에 대한 성과와 한계를 제대로 분석해 목표 미달의 원인을 짚어 해결 방안부터 찾아야 한다. 그래야 기본계획의 실현 가능성과 신뢰를 높일 수 있다.

최근 발표된 스위스 IMD의 국가경쟁력(국가·기업의 부의 증진과 삶의 질 향상 보유 역량) 평가에서 한국은 63개국 중 27위로 떨어졌다. 정부효율성 36위, 기업효율성 33위, 기업가정신 공유 50위, 생산성 35위 등이다. 이쯤 되면 과학기술기본계획의 임무도 재정 투입의 효율성과 생산성 향상이 돼야 할 것이다. 재정 투입 증가는 한계에 달했기 때문이다.

핵심은 기업가정신의 고양이다. 기업가정신에 대해 피터 드러커는 위험을 무릅쓰는 모험과 도전의 정신이라 했고, 조지프 슘페터는 본질이 혁신이라고 했다. 핀란드 국민기업 노키아는 한때 GDP의 20%를 차지했으나 기업가정신 쇠퇴로 혁신동력을 상실해  몰락했다. 노키아 위기로 국가적 충격에 빠졌을 때, 알토대학 학생들은 2010년 알토이에스(AaltoES) 동아리를 만들어 ‘사회적으로 실패를 포용하자’는 ‘실패의 날’ 캠페인을 시작한다. 그 2년 뒤 ‘세계 실패의 날’(10월 13일)이 제정된다. 핀란드 특유의 철학이라는 시수(Sisu), 즉 역경을 딛고 위기를 극복하는 ‘내면의 힘’으로 핀란드는 열악한 지정학적 조건을 딛고 경제부국이자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가 됐다.

경제안보시대, 기업가정신은 기업뿐 아니라 국가와 R&D 현장에서도 필수 덕목이다. 경제학자 마리아나 마주카토가 ‘기업가형 국가’(Entrepreneurial State)에서 제시한 혁신모델이 딱이다. 개방적 환경으로 R&D 성과를 높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혁신기업이 번성하는 국가, R&D 예산 증액이 아니라 혁신 시스템 개조로 투자 대비 성과를 올리는 국가가 답이다. 미국 정부는 기업가적 안목으로 투자와 혁신을 주도한 결과 컴퓨터·나노기술·바이오·제약산업 대국이 됐다. 인터넷, GPS, SIRI의 핵심기술, 알고리즘 개발도 기업가형 국가의 성취였다. 이번 한국의 제5차 과학기술 기본계획은 시행착오나 도전과정에서의 실패를 학습기회로 활용하고 투자 대비 성과를 높이는 로드맵이 돼야 할 것이다.

김명자 서울국제포럼 회장·한국과총 명예회장·전 환경부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