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에서 본 낯선 이 배우…4000명 얼굴 그린 화가였다

중앙일보

입력 2022.06.20 00:03

업데이트 2022.06.20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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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출연한 발달장애인 정은혜씨. 그가 작가로 거듭나는 여정을 그린 다큐멘터리 ‘니얼굴’이 23일 개봉한다. [사진 영화사 진진]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출연한 발달장애인 정은혜씨. 그가 작가로 거듭나는 여정을 그린 다큐멘터리 ‘니얼굴’이 23일 개봉한다. [사진 영화사 진진]

“영희가 말했다. 내가 보고 싶을 때마다, 외로울 때마다 그림을 그리다 보니, 그렇게 잘 그리게 됐다고.”

15%대 시청률을 기록하며 지난 12일 종영한 tvN의 20부작 주말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해녀 영옥(한지민)은 이런 독백을 하며 눈물을 흘린다. 영희는 극에서 영옥의 다운증후군 쌍둥이 언니. 실제 다운증후군 질환을 앓는 정은혜(32)씨가 영희 역을 연기해 화제가 됐다.

미국선 청각장애인 배우가 오스카상  

올 3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3관왕에 오른 ‘코다’가 남우조연상의 트로이 코처 등 청각장애 가족 역할을 실제 청각장애인 배우들이 맡아 장애인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바꿔놨다고 호평받기도 했다.

극 중 영희는 쾌활한 성격에 개성 강한 그림을 그린다. 이런 설정은 실제 정씨를 빼닮았다. 그는 2016년 경기도 양평 문호리리버마켓에서 캐리커처 작가 활동을 시작해 지금껏 4000명 넘게 얼굴을 그려 온 전문 작가다. 하지만 자신의 그림 재능을 23세인 2013년까지 몰랐다. 만화가인 어머니가 화실에서 그림 가르치는 걸 보던 정씨가 자기도 한번 그려보겠다며 잡지 광고 모델을 그린 게 시작이었다. 그의 독특한 화풍은 판에 박힌 생활을 하던 정씨의 삶을 장애라는 틀에서 탈출시킨 열쇠가 됐다.

정은혜씨가 그린 자화상. 정씨의 그림이 입소문을 타면서 초상화를 의뢰하는 단골도 생겼다.

정은혜씨가 그린 자화상. 정씨의 그림이 입소문을 타면서 초상화를 의뢰하는 단골도 생겼다.

그의 이런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니얼굴’이 오는 23일 개봉한다. 다큐 감독인 아버지 서동일(51)씨가 연출하고, 어머니 장차현실(58) 작가가 프로듀서를 맡았다. 다큐는 세상의 편견 어린 시선에 상처받아 집에서 뜨개질만 하던 정씨가 돈을 받고 그림 그리는 작가로 독립하는 3년여를 카메라에 담았다. 이듬해 완성한 영화는 부산국제영화제, 미국 텍사스 다큐영화제 2021신라인페스트 등에 초청됐다.

지난 14일 서울 CGV 용산 아이파크몰에서 열린 ‘니얼굴’ 언론 시사회 이후 간담회에 아버지·어머니와 함께 참석한 정씨는 “그림 그리면서 제일 행복하다”는 드라마 속 영희 못지않은 긍정 에너지로 행사 분위기를 주도했다.

그는 티격태격하는 가족과의 다큐에 대해 “많이 해서, 몇 번 해봐서 좀 지루하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다큐에서 마음에 안 드는 장면을 묻자 “혼잣말하는 거, 살찐 거”라고 말하며 웃었다.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해녀 영옥(한지민)과 발달 장애가 있는 쌍둥이 언니로 출연한 정은혜씨. [사진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해녀 영옥(한지민)과 발달 장애가 있는 쌍둥이 언니로 출연한 정은혜씨. [사진 tvN]

초상화를 주문하는 손님이 “예쁘게 그려주세요” 하면 “원래 예쁜데요. 뭘~” 대꾸하는 정씨. 다큐엔 그런 정씨의 일상사가 담겼다. 잠에서 갓 깨어 부스스한 모습부터 야외 마켓에서 폭염·추위 속에 그림을 그리느라 부르튼 손발, 엄마 잔소리에 짜증을 내다가도 스케치에 금세 빠져드는 시선을 클로즈업했다. 서 감독은 “처음에는 은혜씨가 20대 중반이 됐는데 맨날 방구석에서 갈 데도 없고 할 일도 없고 뜨개질하면서 혼잣말하고 싸우고 새벽에 자고 오후에 일어나는 현실을 보면서 암담했다. 저나 아내나 우울하게 만드는 외면하고 싶은 모습이었는데 은혜씨가 그림을 그리면서 달라졌다”면서 “세상에 자기 존재를 증명받고 싶은 삶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해 클로즈업 샷을 많이 찍었다”고 했다.

가감 없는 클로즈업은 다운증후군 질환자의 외모에 대한 거리감을 지우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서 감독은 “‘우리들의 블루스’ 출연으로 대중적 관심과 사랑을 받았지만, 은혜씨의 다운증후군 외모, 표정이라든지 행동, 말투 등이 이전에는 이상하고 낯설게 보이고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요인들로 작용했다”면서 “드라마와 제 영화를 통해 지금은 사랑스럽고 귀엽고 매력적인 요소로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것 같아 반갑고 기분이 좋다”고 했다.

정씨 가족 이야기가 세상에 선보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장 작가는 생후 3개월에 다운증후군 판정을 받은 정씨가 초등학생이 될 무렵 남편과 이혼했다. 이후 다운증후군 딸과 억척스레 산 경험을 『엄마, 외로운 거 그만하고 밥먹자』 『또리네 집』 등 책과 만화를 통해 진솔하고 유쾌하게 그려왔다. 2004년 7세 연하 서 감독과 경기도 양평에서 한집 살이를 시작한 뒤 이듬해 막내아들 은백씨를 낳았다.

입소문 퍼지며 초상화 단골도 생겨

정씨 그림이 입소문을 타며 초상화를 의뢰하는 단골도 생겼다. 캐리커처로 번 돈으로 2017년 문호리리버마켓 야외 전시장에서 개최한 ‘천명의 얼굴’ 전을 시작으로, 북한산 우이역 공공예술 프로젝트 ‘달리는 미술관-2’(2017), 양평 폐공장 캐리커처 전시 ‘니얼굴 2000’(2019), 창성동실험실에서 연 ‘개와 사람전’(2021) 등 전시회를 열어 왔다. 8월에는 개인전 ‘포옹전’을 연다.

서 감독은 “은혜씨와 같은 발달장애인은 이 세상에 태어나 어떤 곳에도 속하지 않고 경계인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존재지만 은혜씨는 그림을 통해 자기 존재를 확장하고 누구도 초대해 주지 않았지만, 예술을 통해 세상 사람들을 초대했다”며 “자기 스스로 성장하고 아티스트로서 세상 중심으로 당당하게 서는 그런 모습을 이번 다큐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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