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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블' 한지민 언니…다운증후군 정은혜, 스물셋에 찾은 '기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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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니 얼굴'(23일 개봉)은 발달장애인 정은혜씨가 캐리커처 작가로 거듭나는 여정을 그렸다. 아버지 서동일 감독이 촬영, 연출하고 어머니 장차현실 만화가가 프로듀서를 맡았다. [사진 영화사 진진]

다큐멘터리 '니 얼굴'(23일 개봉)은 발달장애인 정은혜씨가 캐리커처 작가로 거듭나는 여정을 그렸다. 아버지 서동일 감독이 촬영, 연출하고 어머니 장차현실 만화가가 프로듀서를 맡았다. [사진 영화사 진진]

“영희가 말했다. 내가 보고 싶을 때마다, 외로울 때마다 그림을 그리다 보니, 그렇게 잘 그리게 됐다고.”

23일 개봉 다큐 '니얼굴' 주인공 #4000명 초상화 그린 정은혜씨 #장애로 고립…20대 때 그림 눈떠 #드라마 '블루스' 한지민 언니로 주목

15%대의 준수한 시청률을 기록하며 지난 12일 종영한 tvN의 20부작 주말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tvN)에서 해녀 영옥(한지민)은 이런 독백을 하며 눈물을 흘린다. '영희'는 극에서 영옥의 다운증후군 쌍둥이 언니. 실제 다운증후군 질환을 앓는 정은혜(32)씨가 영희 역을 연기해 화제가 됐다. 장애인 당사자를 직접 출연시켜 소수자(장애인)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환기한 용기 있는 정공법이다. 올 3월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3관왕에 오른 ‘코다’가 남우조연상의 트로이 코처 등 청각장애 가족 역할을 실제 청각장애인 배우들이 맡아 장애인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바꿔놨다고 호평받기도 했다.
극중 영희는 쾌활한 성격이다. 개성 강한 그림도 그린다. 이런 부차적인 설정까지 실제 정은혜를 빼닮았다. 그는 2016년 경기도 양평 문호리리버마켓에서 캐리커처 작가 활동을 시작해 지금껏 4000명 넘게 얼굴을 그려 온 전문 작가다. 하지만 자신의 그림 재능을 스물세 살 무렵이던 2013년까지 몰랐다. 만화가인 어머니가 화실에서 그림 가르치는 걸 보던 은혜씨가 자기도 한번 그려보겠다며 잡지 광고 모델을 그린 게 시작이었다. 한 번도 그림을 배운 적 없는 그의 독특한 화풍은 판에 박힌 생활을 하던 은혜씨의 삶을 장애라는 틀에서 탈출시킨 열쇠가 됐다.

"노희경 작가, 멋지다 잘한다 해주셨죠"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선 '이영옥(한지민씨)'의 쌍둥이 언니로 발달장애를 겪는 '이영희(정은혜씨)'가 등장한다. 영희의 등장 초반, 그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드라마 속 주변 인물들의 시선은 발달장애인 가정이 겪는 현실을 비교적 잘 나타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리들의 블루스' 영상 캡쳐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선 '이영옥(한지민씨)'의 쌍둥이 언니로 발달장애를 겪는 '이영희(정은혜씨)'가 등장한다. 영희의 등장 초반, 그를 신기하게 바라보는 드라마 속 주변 인물들의 시선은 발달장애인 가정이 겪는 현실을 비교적 잘 나타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리들의 블루스' 영상 캡쳐

그의 이런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니얼굴’이 오는 23일 개봉한다. 다큐 감독인 아버지 서동일(51)씨가 연출하고, 어머니 장차현실(58) 작가가 프로듀서를 맡았다. 다큐는 한때 세상의 편견 어린 시선에 상처받아 집에서 뜨개질만 하던 은혜씨가 처음 마켓에서 돈을 받고 그림 그리는 작가로 독립하는 과정을 2019년까지 3년여를 카메라에 담았다. 이듬해 완성한 영화는 부산국제영화제, 미국 텍사스 다큐영화제 2021씬라인페스트 등에 초청됐다.
 20세 이상 장애인의 자립기일뿐 아니라, 그림뿐 아니라 자유로운 춤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흥미로운 예술가의 탄생기다. “뭐든 엄마가 뒤를 봐줘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없으니까 은혜씨가 스스로 다 하더라”는 장 작가도, “아빠로서 응원하는 마음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는데 좀 지나다 보니까 장난이 아니더라”는 서 감독도, 딸이 지금처럼 될줄은 예상하지 못했단다. ‘니얼굴’이 온 가족의 성장담인 까닭이다.
“기분 좋을 때 그리죠. 사람들 만나서 이 순간을 그림으로 그려요.”
14일 서울 CGV 용산 아이파크몰에서 열린 ‘니얼굴’ 언론 시사 후 간담회에 아버지·어머니와 함께 참석한 정은혜 작가의 말이다. “그림 그리면서 제일 행복하다”는 그는 드라마 속 영희 못지않은 긍정 에너지로 행사 분위기를 주도했다. 앞서 ‘니얼굴’ VIP 시사를 찾은 ‘우리들의 블루스’ 노희경 작가에 대해 “멋지다고 잘한다고 해주셔서, 마음씨가 따뜻한 사람이어서, 멋지고 감사하고 정말 감동했다”고도 전했다.

다큐멘터리 '니 얼굴'(23일 개봉)에서 발달장애인 화가 정은혜씨가 문호리리버마켓에서 찾아온 손님의 캐리커처를 그리는 장면이다. [사진 영화사 진진]

다큐멘터리 '니 얼굴'(23일 개봉)에서 발달장애인 화가 정은혜씨가 문호리리버마켓에서 찾아온 손님의 캐리커처를 그리는 장면이다. [사진 영화사 진진]

정은혜 작가는 4000 명의 초상화를 그린 비결에 대해 “사람들이 많이 오면서 그림에 관심을 가져주고 좋아하고 그러면서 많이 그렸다 . 그림이 더 늘었다. 천천히 그려서 우편으로 보내주고 하면서 점점 늘고 또 늘고 하니까, 빨라졌다”고 말했다 .[사진 영화사 진진]

정은혜 작가는 4000 명의 초상화를 그린 비결에 대해 “사람들이 많이 오면서 그림에 관심을 가져주고 좋아하고 그러면서 많이 그렸다 . 그림이 더 늘었다. 천천히 그려서 우편으로 보내주고 하면서 점점 늘고 또 늘고 하니까, 빨라졌다”고 말했다 .[사진 영화사 진진]

그는 드라마에 대해서는 “촬영하면서 긴장, 떨림 없이 재밌고 신기하고 또 선배님들과 같이 연기하면서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늘상 티격타격하는 가족과의 다큐는 “많이 해서, 몇 번 해봐서 좀 지루하다”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다큐에서 마음에 안 드는 장면을 묻자 “혼잣말하는 거, 살찐 거”라고 콕 집어 말하며 웃었다.

스물셋에 눈뜬 그림 재능으로 인생 역전 

초상화를 주문하는 손님이 “예쁘게 그려주세요” 하면 “원래 예쁜데요 뭘~” 대꾸하는 은혜씨. 다큐엔 그런 은혜씨의 일상사가 가감 없이 담겼다. 잠에서 갓 깨어 부스스한 모습부터 야외 마켓에서 폭염‧추위 속에 그림을 그리느라 부르튼 손발, 엄마 잔소리에 짜증을 내다가도 스케치에 금세 빠져드는 시선을 클로즈업했다. 그간 방송에서 장애인을 깨끗하고 단정하게 보이도록 애썼던 것과 달리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려 한 서 감독의 의도다.
서 감독은 “처음에는 은혜씨가 20대 중반이 됐는데 맨날 방구석에서 갈 데도 없고 할 일도 없고 뜨개질하면서 혼잣말하고 싸우고 새벽에 자고 오후에 일어나는 현실을 보면서 암담했다. 저나 아내나 우울하게 만드는 외면하고 싶은 모습이었는데 은혜씨가 그림을 그리면서 달라졌다. 주야장천 앉아서 그림만 그리는 모습이 은혜씨가 그림을 통해 뭔가 얘기하고 싶구나, 느껴졌다”면서 “세상에 자기 존재를 증명받고 싶은 삶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판단해서 클로즈업 샷을 많이 찍었다”고 했다. “은혜씨의 당당함, 위트, 자존감, 매력들을 잘 살도록 편집했다. 엄마를 가급적 덜어내고 은혜가 사람들과 소통하고 그림 그리는 주체적인 모습을 보이려 했다”면서다. 공식 행사인 만큼 부부는 작가이자 다큐 주인공인 딸의 이름을 높여 불렀다.

가감 없는 클로즈업은 다운증후군 질환자의 외모에 대한 거리감을 지우려는 노력이기도 했다. 서 감독은 “‘우리들의 블루스’ 출연으로 대중적 관심과 사랑을 받았지만, 은혜씨의 다운증후군 외모, 표정이라든지 행동, 말투 등이 이전에는 이상하고 낯설게 보이고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요인들로 작용했다”면서 “드라마와 제 영화를 통해 지금은 사랑스럽고 귀엽고 매력적인 요소로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것 같아 반갑고 기분이 좋다. 세상의 모든 발달장애인을 그런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주고 응원하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길 바란다”고 했다.

다운증후군 딸과 싱글맘 만화가, 네 식구 되기까지 

정은혜씨 가족의 다큐는 '작은 여자 큰 여자 그 사이에 낀 남자-에피소드' 1, 2편도 있다. 서동일 감독이 만화가 장차현실, 두 사람 사이의 막내아들, 은혜씨까지 네식구가 되어가는 과정을 솔직하게 담아냈다.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정은혜씨 가족의 다큐는 '작은 여자 큰 여자 그 사이에 낀 남자-에피소드' 1, 2편도 있다. 서동일 감독이 만화가 장차현실, 두 사람 사이의 막내아들, 은혜씨까지 네식구가 되어가는 과정을 솔직하게 담아냈다. [사진 부산국제영화제]

은혜씨 가족 이야기가 세상에 선보인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장차현실 작가는 생후 3개월에 다운증후군 판정을 받은 은혜씨가 초등학생 될 무렵 남편과 이혼했다. 이후 다운증후군 딸과 억척스레 살아온 경험을 『엄마, 외로운 거 그만하고 밥먹자』 『또리네 집』 등 책과 만화를 통해 진솔하되 밝고 유쾌하게 그려왔다. 2004년 7살 연하 서 감독과 경기도 양평에서 한집 살이를 시작한 뒤 그는 이듬해 막내아들 은백을 낳았다. 네 식구가 좌충우돌 겪은 성장통은 서 감독의 당시 다큐 ‘작은 여자, 큰 여자, 그 사이에 낀 남자’ 에피소드 1‧2편에 담겨 2007년 부산국제영화제 등에서 공개됐다. 2008년 부부가 결혼식 대신 연 ‘가족식’에선 은혜씨가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축하곡으로 불렀다.
이후 은혜씨가 사회에서 고립됐던 시기를 지나기까지 장 작가는 “남편과 한 달에 최소한 두 번씩은 (마음으로) 이혼했던 것 같다”고 온 식구가 힘겨웠던 지난날을 회고했다. 뒤늦게 발견한 딸의 자질이 경제적 홀로서기뿐 아니라 가족 같은 친구들을 만들어준 것도 감사할 일이라고 했다. “가족의 사랑만으로는 견딜 수 없는 나이가 됐다. 엄마‧아빠가 아무리 사랑해줘도, 가족이 아무리 든든해도 20살 넘은 발달장애인 은혜에게는 그런 사회적 관계가 너무나도 좋을 수밖에 없다”면서다.

"누구도 초대해주지 않은 은혜씨, 예술로 세상 초대했죠" 

16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다큐 '니얼굴'의 서동일 감독(왼쪽부터)과 어머니 장차현실 작가, 정은혜 씨가 포즈 취하고 있다. 이번 다큐를 부산국제영화제에 첫 공개한 2020년부터 가족 유튜브 채널 '니얼굴 은혜씨_Caricature Artist Eunhye'을 열고 은혜씨의 그림 활동에 새로운 소통 창구로 활용해 왔다. [연합뉴스]

16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다큐 '니얼굴'의 서동일 감독(왼쪽부터)과 어머니 장차현실 작가, 정은혜 씨가 포즈 취하고 있다. 이번 다큐를 부산국제영화제에 첫 공개한 2020년부터 가족 유튜브 채널 '니얼굴 은혜씨_Caricature Artist Eunhye'을 열고 은혜씨의 그림 활동에 새로운 소통 창구로 활용해 왔다. [연합뉴스]

은혜씨는 그림이 입소문 나며 초상화를 여러 차례 의뢰하는 단골도 생겼다. 캐리커처로 번 돈으로 2017년 문호리리버마켓 야외 전시장에서 개최한 ‘천명의 얼굴’전을 시작으로, 북한산 우이역 공공예술 프로젝트 ‘달리는 미술관-2’(2017), 양평 폐공장 캐리커처 전시 ‘니얼굴 2000’(2019), 창성동실험실에서 연 ‘개와 사람전’(2021) 등 전시회를 열어왔다. 지금은 경기장애인부모연대 양평지구 회장을 맡고 있는 어머니 장 작가를 중심으로 20명 동료 화가들과 그림을 그려 월급을 받는 어엿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8월에는 개인전 ‘포옹전’을 연다. 지난 16일 기자들과 만난 그는 “사람들을 반가워하는 포옹이고, 아주 오랜만에 보는 사람도 포옹한다”고 전시 주제를 설명했다. 서동일 감독은 “제가 감독이지만, 은혜씨의 로드매니저라는 또 하나의 직책이 생겼다”면서 “이제는 은혜씨가 우리 부모를 부양하는 것 같은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고 있다”고 했다. “은혜씨와 같은 발달장애인은 이 세상에 태어나 어떤 곳에도 속하지 않고 경계인의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존재지만 은혜씨는 그림을 통해 자기 존재를 확장하고 누구도 초대해주지 않았지만, 예술을 통해 세상 사람들을 초대했죠. 자기 스스로 성장하고 아티스트로서 세상 중심으로 당당하게 서는 그런 모습을 이번 다큐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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