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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터, 잊지말라"…靑이 '창경원' 같은 유원지 안되려면 [뉴스원샷]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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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문화재위원회 12개 분과의 위원장들이 청와대 본관 내부를 답사하는 모습. 일반 관람객들과 섞여 계단부터 혼잡하다. [사진 문화재청]

17일 문화재위원회 12개 분과의 위원장들이 청와대 본관 내부를 답사하는 모습. 일반 관람객들과 섞여 계단부터 혼잡하다. [사진 문화재청]

요즘 청와대 분위기는 흡사 어린이날 놀이동산 같습니다. 관람객들의 물결에 휩쓰려 까딱하단 일행을 놓칠 지경입니다. 본관과 관저 내부로 들어가기 위한 줄은 또 얼마나 긴지요. 17일 오전 찾아간 청와대 본관 앞에선 ‘여기서부터 60분’이란 푯말 뒤로도 줄이 한참 더 이어졌습니다. 땡볕 아래에서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본관 내부 관람이 가능한 겁니다.

지난 5월 10일 개방된 이후 청와대를 찾은 관람객은 91만명에 이릅니다. 2021년 1년 동안의 경복궁 관람객 수가 108만명인 것과 비교해 보면, 청와대의 관람객 폭주 현상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됩니다. 개방된 청와대에 이렇게 열렬한 호응이 이어지고 있지만,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관광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곳이 될 것 같다”(이재운 문화재위원회 사적분과 위원장)는 걱정입니다.

17일은 문화재위원회 12개 분과의 위원장들이 청와대의 문화재 현황 조사를 위해 처음으로 공식 답사한 날이었습니다. 대통령 공약 이행 차원에서 청와대가 전격 개방돼 한 달 넘게 운영되기까지 문화재 보존ㆍ활용을 위한 자문기관, 문화재위원회의 의견은 한 차례도 전해지지 않았던 겁니다.

지난 15일 오후 청와대를 찾은 시민들이 본관 입장을 위해 줄을 서 있는 모습. 연합뉴스

지난 15일 오후 청와대를 찾은 시민들이 본관 입장을 위해 줄을 서 있는 모습. 연합뉴스

이날 위원장들은 1시간 30분 가량 본관과 영빈관ㆍ녹지원ㆍ침류각ㆍ오운정ㆍ미남불 등을 둘러본 뒤 본관 앞에서 간단히 소회를 밝히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들이 강조하는 대목은 자신의 ‘전공’ 분야에 따라 약간씩 달랐습니다. 천연기념물분과위원장을 겸하고 있는 전영우 문화재위원장은 “청와대는 고려시대부터 1000년 간 우리의 역사가 담긴 문화유산이자 180여종에 이르는 나무 5만 그루가 자라는 자연유산”이라고 했고, 윤인석 근대분과위원장은 “근현대사에 있어 중요한 청와대 터를 근대역사문화공간으로 우선 등록해 보존하자”고 했습니다. 이 밖에 “경복궁에 속한 터라는 것을 잊지 말고, 이 땅의 가치를 바라보는 넓고 깊은 눈이 필요하다”(박경립 궁능분과위원장),  “청와대에서 조상의 숨결이 담긴 품격 있는 전통 공연이 펼쳐지면 가치가 더 높아질 것”(김영운 무형문화재위원장) 등의 주장이 이어졌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의견이 나왔지만, “활용 문제를 논의하기 전에 역사적ㆍ문화적 가치에 대한 조사가 선행돼야 한다”는 것만큼은 12명 위원장들의 공통된 목소리였습니다. 이는 16일 대한건축학회가 주최한 심포지엄 ‘청와대 개방 이후:경복궁 후원에서 청와대까지’의 발표 내용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심포지엄 발표자로 나선 이강근 서울시립대 교수는 “갑작스레 개방돼 누구나 구경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지만, 청와대 터와 건물과 시설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야 좋을지 새 정부가 혼란을 일으킨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못박았습니다. “이 터의 역사와 가치를 재조명하고 새로운 가치를 어떻게 부여하는 게 좋을지 합의를 도출해 가는 민주적인 과정이 절실하게 요구된다”면서입니다.

'창경원' 관람객이 7일 동안 16만 명이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신문 기사. 1928년 4월 29일자 동아일보다. [사진 문화재청]

'창경원' 관람객이 7일 동안 16만 명이었다는 소식을 전하는 신문 기사. 1928년 4월 29일자 동아일보다. [사진 문화재청]

이날 심포지엄에서 김종헌 배재대 교수와 김성도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 안전방재연구실장 등 여러 명의 발표자가 창경궁의 ‘창경원’ 시절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청와대를 창경원처럼 공원이나 유원지로 위락화해선 안된다는 거지요. 김 교수는 7일 만에 16만 명이 ‘창경원’을 구경왔다는 1928년 신문 기사를 보여주면서 “궁궐의 훼철에 대한 선례는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문화유산의 이용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원래의 기능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고종 대부터 현재에 이어져온 통치공간으로서의 장소성과 상징성을 지속시킬 필요가 있다”고 조언합니다.

청와대 개방은 조사ㆍ연구ㆍ의견수렴 등의 과정을 모두 생략한 채 이뤄졌습니다. 부작용을 최소화하려면 이제라도 심도 깊은 논의 과정이 필요할 터입니다. 17일 겨우 들어간 청와대 본관 안에서 안내요원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사진은 빠르게 찍고 이동하실게요” “이동 중 멈추시면 위험합니다” 등의 재촉이었습니다. ‘갔다 왔다’는 체험 이상의 의미를 찾기는 아직 힘들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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