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호의 예수뎐] "달리다 굼!" 예수가 말한다…"달리다 굼!" 예수가 묻는다

중앙일보

입력 2022.06.18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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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예수뎐]  

여자는 예수의 옷에 손을 댔다. 영어로는 ‘touching’이다. 그것은 단순히 옷자락을 만진다는 뜻이 아니다. 그리스어 성서를 보면 더 명확하다. ‘(손을) 대다’는 그리스어로 ‘hapsomai’다. 거기에는 ‘불을 밝히다(light)’, ‘(관심이나 감정에) 불을 붙이다(kindle)’라는 뜻이 담겨 있다.

예수는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소녀를 향해 "일어나라"고 말하자 소녀는 일어났다고 성경에 기록돼 있다. 거기에 담긴 메시지는 무엇일까. [중앙포토]

예수는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소녀를 향해 "일어나라"고 말하자 소녀는 일어났다고 성경에 기록돼 있다. 거기에 담긴 메시지는 무엇일까. [중앙포토]

그러니 여자가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댄 것은 무슨 일이겠는가. 그것은 ‘불을 밝히는’ 일이었다. 여자의 마음에 ‘불을 밝히고, 불을 붙이는’ 일이었다. 그 불로 인해 하혈이 멈추었다.

(50)죽었다는 12살 소녀를 일으킨 예수의 말 “달리다 굼!”

예수는 자신에게서 힘이 나간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군중을 향해 돌아서며 물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반문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서로 밀쳐대는데 어째서 그런 질문을 하느냐고 물었다.

예수는 사방을 둘러봤다. 그때 여자가 앞으로 나아갔다. 예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말했다. 그러자 예수는 이렇게 답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마르코 복음서 5장 34절)

예수의 대답은 다소 뜻밖이다. “나의 능력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했다. 왜 그랬을까. 예수의 옷자락이 그녀를 구원했는데, 왜 예수는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했을까. 여기서 우리는 ‘치유의 작동원리’를 볼 수 있다.

오랜 세월 하혈하며 고통 받던 여인은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댄 뒤에 고통이 멈추는 걸 느꼈다. [중앙포토]

오랜 세월 하혈하며 고통 받던 여인은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댄 뒤에 고통이 멈추는 걸 느꼈다. [중앙포토]

여자는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부정한 여자가 손을 댔으니 상대방은 오염되어야 마땅하다. 하혈하는 여자가 손을 댔으니 예수는 부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예수로 인해 오히려 하혈하는 여자가 깨끗해졌다. 그것이 바로 빛의 힘이다.

어둠이 빛을 만지면 어찌 될까. 캄캄해질까. 어둠만 남게 될까. 아니다. 밝아진다. 어둠이 빛이 된다. 그래서 여자의 내면에 ‘불이 켜졌다(kindle)’. 그것이 믿음이다. 어둠이 자기 안의 빛을 믿는 일. 자기 안의 빛을 깨닫는 일. 그래서 예수도 말했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럴 때 상처의 뿌리가 소멸된다. 끝없이 상처에 양분을 공급해주던 ‘내 안의 어둠’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기독교 영성가 다석 유영모는 ‘별’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밤하늘의 별은 하느님이 앞 못 보고,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점자(點字)로 보낸 메시지다. 생각이라는 마음의 손을 내밀고, 그 점자를 더듬어 읽어 하느님의 메시지를 읽어낸다.”

‘하혈하는 여자를 치유한 예수의 일화’도 우리에게는 점자다. 단순한 이적 일화로만 읽기에는 그 안에 담긴 메시지가 자꾸만 반짝인다. 자기 안에 흐르는 ‘신의 속성’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우리는 손을 내밀어 더듬거리며 일화 속의 별들을 헤아리려 한다. 그 별을 통해 새겨진 점자를 하나씩 둘씩 해독하며 걸음을 뗀다.

갈릴리 호수 주위를 돌다보며 오래된 유대교 회당 건물을 볼 수 있다. 예수도 이 회당들을 돌아다니며 설교를 했다. [중앙포토]

갈릴리 호수 주위를 돌다보며 오래된 유대교 회당 건물을 볼 수 있다. 예수도 이 회당들을 돌아다니며 설교를 했다. [중앙포토]

예수 당시에도 갈릴래아(갈릴리) 호수 주변에는 유대 회당들이 있었다. 예수는 종종 그곳에서 사람들에게 설교를 했다. 회당은 예루살렘 방향을 바라보게끔 짓는다. 유대교인에게 회당은 예루살렘의 성전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회당장야이로가 급하게 예수를 찾아왔다. 회당장이면 당시 유대 사회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야이로는 열두 살난 자신의 딸이 다 죽게 됐다고 했다. 그는 예수를 보시고 급히 자신의 집으로 갔다.

마침내 예수는 회당장의 집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회당장의 딸이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다. 예수는 회당장에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코 복음서 5장 36절) 집 앞에서 사람들은 큰 소리로 통곡하고 있었다. 예수는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예수를 비웃었다.

우리도 그렇다. 예수를 비웃는다. ‘우리 안에는 어둠뿐이다. 빛은 이미 죽었다. 삶은 순간이고, 고통은 영원하다.’ 우리가 보는 삶은 그렇다. 예수는 달리 말한다. 우리 안의 빛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또 비웃는다. 누가 봐도 죽었는데 아직 살아 있다고 우기니 말이다. 회당장의 집에서 예수를 비웃었던 유대인들처럼 우리도 예수를 비웃는다.

예수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누워 있는 아이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다. “탈리타 쿰(Talitha, coumi)!”(마르코 복음서 5장 41절) 히브리어로 ‘소녀여, 일어나라!’라는 뜻이다. 예수가 직접 사용했던 언어인 아람어로 하면 “달리다 굼!”이다. ‘달리다’는 ‘소녀’, ‘굼’은 ‘일어나다’라는 의미다. 그러자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성경에는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라고 되어 있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예수가 "달리다 굼"이라고 말하자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앙포토]

예수가 "달리다 굼"이라고 말하자 소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중앙포토]

이슬람 영성가루미의 「거울」이라는 시를 이현주 목사는 이렇게 번역했다.

우리는 거울이자 그 속에 비치는 얼굴
순간의 영원을 맛보고 있다
우리는 고통이자 고통을 치료하는 약
달콤한 생수인 우리는 그것을 퍼내는 항아리
―『루미 시초』(늘봄출판사, 2014) 중에서

루미는 노래한다. “우리는 거울이자 그 속에 비치는 얼굴”이라고. 그러니 안과 밖이 둘이 아니다. 어둠과 빛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어둠이자 그 속에 비치는 빛’이다. 너무 짧아서 우리가 절망하는 ‘삶의 순간들’조차 루미는 순간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 순간 속에 ‘영원’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미는 순간을 통해 영원을 맛본다.

‘고통’도 그렇게 노래한다. “우리는 고통이자 고통을 치료하는 약.” 그래서 예수는 말했다. “나의 능력이 너를 구한 것이 아니라 너의 믿음이 너를 구했다”고 말이다. 우리는 고통이자 고통을 치료하는 약이므로. 우리는 어둠이지만 그 속에 빛이 있으니.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구시가지에는 신약성경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 장소들이 곳곳에 있다. [중앙포토]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구시가지에는 신약성경의 배경이 되는 역사적 장소들이 곳곳에 있다. [중앙포토]

그것을 믿지 못하는 우리에게 예수는 말한다.
“달리다 굼!”

어둠은 어둠일 뿐이라고 여기는 우리에게 예수는 또 말한다.
“달리다 굼!”

내 안의 상처가 너무나 깊어 결코 치유될 수 없다고 버티는 우리에게 예수는 다시 말한다.
“달리다 굼!”

일어나라고. 소녀처럼, 하혈하는 여인처럼 일어나라고. 우리 안에 잠자는 빛을 향해 예수는 말한다.
“달리다 굼!”

〈51회에서 계속됩니다. 매주 토요일 연재〉

짧은 생각
어둠과 빛은
서로 반대편에 있습니다.
우리는 그 둘을
양자택일의 대상이라 생각합니다.
어둠인가,
아니면 빛인가.

순간과 영원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둘도
양자택일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순간인가,
아니면 영원인가.

선과 악에 대한 서구 철학의
이분법적 사고도 여기에 기반합니다.
선인가,
아니면 악인가.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는
문제를 풀 수가 없습니다.
어둠과 빛,
순간과 영원,
선과 악의 문제를 풀 수가 없습니다.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를
해결하는 열쇠는
하나뿐입니다.

다름 아닌
상대에게서 나를 봐야 합니다.
어둠 속에서 빛을 보고,
빛을 통해 어둠을 봐야 합니다.
순간을 통해 영원을 보고,
영원이 깃든 순간을 보는 겁니다.

사람들은 묻습니다.
그건 말장난 아니냐고,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은
그게 충분히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모든 것은 그분을 통해 생겨났고,
   그분을 통하지 않고 생겨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순간은 영원을 통해 생겨났고,
영원은 다시 순간을 통해
되살아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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