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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끌 모아 가루 됐다…난 이제 욜로족" 주식 대폭락이 부른 풍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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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오전 서울 중구 을지로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 현황판에 코스피가 표시돼 있다. 이날 뉴욕 증시 영향으로 코스피지수가 장초반 2,400선 아래로 떨어졌다. 연합뉴스

17일 오전 서울 중구 을지로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 현황판에 코스피가 표시돼 있다. 이날 뉴욕 증시 영향으로 코스피지수가 장초반 2,400선 아래로 떨어졌다. 연합뉴스

2년 차 직장인 김모(28)씨는 최근 중고 수입차를 알아보고 있다. 김씨는 "올해 초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했을 일"이라며 "취업한 후 한 번도 돈을 제대로 써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최근 수십만원짜리 안경을 구매하는 등 ‘플렉스’ 소비에 나섰다.

김씨가 소비 패턴을 바꾼 이유는 증권계좌에 찍힌 파란색 때문이다. 그는 “주식과 코인에 매달 100만원씩 넣었던 돈의 절반 이상이 날아갔다”며 “3달 전부터 더는 ‘재테크’를 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물가는 일주일이 다르게 올라가고, 재테크는 답이 없다”며 “어차피 돈을 모을 수 있는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해 당분간 돈을 쓸 생각”이라고 덧붙였다.

“욜로족이 승자” 선언하는 MZ

김씨처럼 소비 대신 소득의 상당 부분을 투자했던 젊은 직장인이 변하고 있다. 코스피지수가 2500선 아래로 떨어지고 비트코인 등 가상화폐 시장도 올해 들어 꾸준히 하락하자 “차라리 욜로(YOLO)족을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욜로는 '인생은 한 번뿐이니 현재를 즐기자'는 가치관을 뜻한다.

최근 직장인 앱인 블라인드에서는 “이제부터라도 욜로 하겠다”는 식의 글이 이어진다. 한 작성자는 “물가가 미쳐버렸다. 환율이 계속 올라 돈 모아도 어차피 마이너스다. 다들 욜로 하자”라고 적었다. 또 다른 작성자는 “(주식이) 너무 하락장이라 그냥 욜로 했다”며 고가의 취미 용품 구매를 인증하기도 했다.

블라인드에 '욜로'를 검색하면 나오는 게시물. 최근 ″재테크보단 소비를 하겠다″는 식의 글이 꾸준히 올라오고 있다. 블라인드 캡쳐

블라인드에 '욜로'를 검색하면 나오는 게시물. 최근 ″재테크보단 소비를 하겠다″는 식의 글이 꾸준히 올라오고 있다. 블라인드 캡쳐

2년간 투자했던 돈의 약 25%를 잃은 정모(27)씨도 최근 싱가포르 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그는 비행기 표가 코로나19 이전보다 약 두 배 비쌌지만 망설이지 않았다고 했다. 정씨는 “예상했던 여행경비보다 약 200만원 정도 더 들 거 같다”면서도 “한 번도 내 취미생활을 위해 이렇게 큰돈을 쓴 적이 없다. 하지만 이제 하고 싶은 걸 참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해 12월 16일 오전 서울시내의 한 백화점을 찾은 시민들이 명품 매장에 들어가기 위해 줄 서 있는 모습. 뉴시스

지난해 12월 16일 오전 서울시내의 한 백화점을 찾은 시민들이 명품 매장에 들어가기 위해 줄 서 있는 모습. 뉴시스

이들은 자신을 위한 소비가 비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직장인 장모(29)씨는 “매달 150만원씩 투자했는데 그 결과 천만원이 그냥 사라졌다. 말 그대로 ‘티끌 모아 가루가 됐다’”며 “어차피 투자하면 없어질 돈인데 취미 생활이나 자기계발을 하는 데 쓰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장씨는 앞으로 1년간 돈을 모으지 않기로 결심했다.

최근 약 300만 원짜리 명품 가방을 산 정모(29)씨도 “주식이 폭락해 수천만 원 손해를 봤다”며 “명품은 값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해 구매를 결정했다”고 했다.

“지금은 ‘원화채굴’ 시기” 직장인도

반면 오히려 지금이 종잣돈을 모아야 할 적기라고 판단한 2030 직장인도 있다. 주가가 크게 떨어진 만큼 언젠가는 반등할 것이라 믿고 기회를 노리는 투자자들이다. 이들 사이에선 투자보단 근로소득으로 현금을 모은다는 의미인 ‘원화채굴’이라는 말이 유행한다.

직장인 이모(29)씨는 올해 들어 이렇다 할 매수는 하지 않는 채 증권계좌에 매달 약 150만원씩 넣고 있다. 그는 “취업하고 나서 지금껏 주식 시장에 들어갈 타이밍을 몰라 재테크에 소홀했다”며 “지금 많이 떨어졌지만 언젠간 분명히 다시 올라갈 거라 생각해서 월급을 모으고 주식 공부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MZ세대의 욜로 선언은 예측불가능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반영된 결과라고 분석한다. 곽금주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는 “미래가 불확실하면 사람들은 미래보다 현재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며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다시 욜로가 유행하기 시작한 건 ‘굳이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희생하지 않겠다’는 의미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계층 상승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좌절감과 무력감이 커지면서 젊은 세대들이 사회적 관계 등에 관심을 갖지 않고 자신만의 소비 활동을 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며 “더 심화할 경우 세대 갈등과 사회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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