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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개 형사재판도 안그런다...이틀만에 '월북' 꺼낸 文정부 난센스 [뉴스원샷]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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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혜 외교안보팀장의 픽 : 해수부 공무원 피살 사건

“형사재판에서 범죄사실의 인정은 법관이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의 확신을 갖게 하는 증명력을 가진 엄격한 증거에 의해야 한다. 그러지 못한 경우에는 설령 피고인의 주장이 모순되거나 석연치 않은 면이 있어 유죄의 의심이 가더라도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해야 한다.”

남편이 보험금을 노리고 사고사를 위장해 부인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사건에서 대법원이 원심을 뒤집고 무죄를 선고하며 든 근거 중 일부다.

(서울=뉴스1) 구윤성 기자 = 북한군에게 피살된 해양수산부 공무원의 유족이 17일 오전 서울 서초구 변호사회관에서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관련 향후 법적 대응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앞서 국방부와 해양경찰은 지난 2020년 9월 21일 서해상에서 북한군의 총격으로 숨진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모씨 사건과 관련해 "실종 공무원의 '자진 월북'을 입증할 수 없다"며 '월북을 시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던 당시 발표 내용을 전격 철회했다. 2022.6.17/뉴스1

(서울=뉴스1) 구윤성 기자 = 북한군에게 피살된 해양수산부 공무원의 유족이 17일 오전 서울 서초구 변호사회관에서 '서해 공무원 피살 사건' 관련 향후 법적 대응 관련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앞서 국방부와 해양경찰은 지난 2020년 9월 21일 서해상에서 북한군의 총격으로 숨진 해양수산부 공무원 이모씨 사건과 관련해 "실종 공무원의 '자진 월북'을 입증할 수 없다"며 '월북을 시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던 당시 발표 내용을 전격 철회했다. 2022.6.17/뉴스1

형사재판을 예로 들었지만, 사실 꼭 피고인이 아니어도 어디든 상식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원칙이기도 하다. 사람을 도둑으로 몰려면 그렇게 주장하는 쪽에서 도둑이란 걸 입증해야지, 도둑으로 몰린 쪽에서 자신이 도둑질을 안 했다고 입증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2020년 9월 서해 상에서 북한군에 의해 목숨을 잃은 해양수산부 공무원 A씨 사건과 관련해 이어지는 월북 논란을 보면서 이런 ‘입증 책임’ 문제가 떠오른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은 16일 A씨의 유족이 제기한 정보공개청구소송 사건에 대한 항소를 취하했다. 해경과 국방부는 A씨가 월북한 것으로 보인다는 전임 문재인 정부의 판단도 뒤집었다.

해경은 “피격된 공무원의 월북 여부를 수사했으나, 북한 해역까지 이동한 경위와 월북 의도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국방부는 “피살된 공무원이 월북을 시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표함으로써 국민께 혼선을 드렸다”고 밝혔다.

그러자 문 전 대통령의 ‘복심’인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반격에 나섰다. “해경을 포함한 우리 정부는 당시 다각도로 첩보를 분석하고 수사를 벌인 결과 월북으로 ‘단정’한 것이 아니라 ‘판단된다’고 밝혔다”고 입장문을 냈다.

또 “당시 문재인 정부의 판단에는 비공개 자산인 군의 특수정보(SI)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며 “오늘 해경의 발표는 월북 의도가 아니라는 명확한 증거도 내놓지 못한 채 ‘월북 의도를 인정할 만한 증거는 발견하지 못했다’는 어정쩡한 결론을 내려, 오히려 교묘하게 사실관계를 호도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지적했다.

사건이 북한 영해에서 일어난 점 등을 고려할 때 조사가 제한적이었고, 정부가 ‘월북으로 판단된다’고 했던 것도 맞다.

박상춘 인천해양경찰서장(왼쪽)과 윤형진 국방부 국방정책실 정책기획과장이 16일 오후 인천시 연수구 인천해양경찰서에서 각각 '서해 공무원 피격사건' 최종 수사 결과 브리핑과 추가 설명을 마친 뒤 취재진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상춘 인천해양경찰서장(왼쪽)과 윤형진 국방부 국방정책실 정책기획과장이 16일 오후 인천시 연수구 인천해양경찰서에서 각각 '서해 공무원 피격사건' 최종 수사 결과 브리핑과 추가 설명을 마친 뒤 취재진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 전제가 뭔가 이상하다. 올바른 질문은 ‘윤 정부가 A씨에게 월북 의도가 없다는 증거를 내놨느냐’가 아니라 ‘문 정부가 A씨에게 월북 의도가 있다고 판단할 증거를 내놨느냐’ 아닌가. 정부가 월북이라고 판단하려면, 이를 입증하는 것도 정부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대법 판례처럼 형사 재판에서는 합리적 의심이 충분히 제거되지 않았다면, 피고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해야 한다.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서다.

A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월북 의도가 있을 것’이 아니라 ‘월북 의도가 없을 것’이라는 추정의 원칙을 전제로 적용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국민이라면 당연히 그랬을 것이고, 그게 국민을 보호하는 국가의 기본 인식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월북이 아니라는 합리적 의심이 충분히 제거되지 않았다면, 월북 의도는 없는 것으로 보는 쪽이 더 합당하다.
월북 판단의 결정적 근거였다던 SI의 구체적 내용도 공개되진 않았지만, 당시 정부·여당 인사들의 발언을 보면 짐작이 가능하다.

 지난 2020년 9월 인천시 연수구 해양경찰청 회의실에서 연평도 실종공무원 중간 수사 결과 브리핑이 진행되고 있다. 뉴스1

지난 2020년 9월 인천시 연수구 해양경찰청 회의실에서 연평도 실종공무원 중간 수사 결과 브리핑이 진행되고 있다. 뉴스1

“실종자가 구명조끼를 착용한 점, 월북 의사를 표명한 점이 식별된 점 등을 고려해 자진 월북을 시도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국방부 관계자, 2020년 9월 24일 브리핑)
“한‧미 첩보에 의하면 월북은 사실로 확인돼 가고 있다. 월북 의사를 확인하고, 대화 등에서 정황들이 들어있다. 북한 함정과 실종자의 대화 내용이다.”(황희 민주당 의원, 2020년 9월 28일 민주당 서해 상 공무원 피살 사건 관련 공동조사·재발방지 특위 브리핑)
“우리 정보 판단에 의하면 (북한군이 A씨와)대화가 가능한 거리에서 심문 내지는 검문을 했다.”(김병주 민주당 의원, 같은 브리핑)
“북측에서 실종자의 인적사항을 소상히 알고 있었으며, 북측에 월북 의사를 표명한 정황 등을 종합해볼 때 월북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해양경찰청 윤성현 수사정보국장, 2020년 9월 29일 중간수사결과 브리핑)

북한군과 맞닥뜨린 A씨가 월북을 위해 넘어왔다고 했고, 군 당국은 감청 등을 통해 이런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과연 이를 합리적 의심을 넘어서는 명확한 증거로 볼 수 있을까.

우선 총을 든 북한군 앞에서 A씨가 생존을 위해 순간적으로 월북 의사를 지어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또 유족들은 평소 A씨의 품성과 언행 등으로 볼 때 월북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고 일관되게 주장한다.

이런 게 합리적 의심이다. 그리고 문 정부가 이런 합리적 의심을 넘어설 만한 증명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논란이 계속되는 것이다. 사안의 무게감과 국민적 파장을 고려했을 때 ‘군 첩보라 공개하기는 어렵지만, 정부가 어련히 알아서 잘 판단했을까’라는 식으로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북한군에 사살된 해양수산부 공무원 A씨가 탑승했던 어업지도선 무궁화 10호. 연합뉴스

북한군에 사살된 해양수산부 공무원 A씨가 탑승했던 어업지도선 무궁화 10호. 연합뉴스

심지어 A씨는 북한군에 의해 사살당해 이제 본인의 온전한 입장을 밝힐 수도 없다. A씨가 당시 어떤 상황과 맥락에서, 무슨 의도로 월북 의사를 밝혔는지 진술할 기회조차 없다.

다시 형사 재판으로 돌아가 보자. 형사소송법 310조의2는 전문증거(타인이 ‘누가 ~~라고 말했다’고 전하는 진술)는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고 규정한다. 증인의 법정 증언조차도 피고인 측이 이를 반박하기 위한 반대신문을 하지 못할 때는 증거능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게 판례다.

일개 형사 재판에서도 이런데, 심지어 우리 국민이 적에 의해 잔인하게 목숨을 잃은 사건이었다. 북한군 감청에서 입수한 A씨의 월북 의사 표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월북의 근거로 삼기엔 조심스러운 이유도 여기 있다.

애초에 A씨가 살해된 지 불과 이틀 뒤부터 월북 가능성이, 그것도 정부발로 제기된 상황 자체가 의아했다. 중요한 건 살해 당시 상황에 대한 진상 및 북한의 책임 규명이었다. 설령 A씨가 월북 의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북한이 우리 국민을 총으로 쏴 사살하고, 시신을 함부로 불태운 만행의 본질은 달라지는 게 없다.

하지만 해경은 “전체 채무 3억 3000만원에 도박빚이 2억 6800만원”까지 공개하며 월북 정황을 입증하는 데 더 열심인 것처럼 보였다. 뭐가 그리 급했는지 모를 일이다.

A씨 유족의 말처럼 진실 규명을 위한 첫 단추가 이제야 끼워졌다. 유족들은 해경 수사 책임자들도 고발할 생각이다. 감사원도 감사에 착수했다. 정부가 당시 A씨의 월북 의도에 대한 합리적 의심을 그렇게까지 신속하게 제거한 이유가 무엇인지 차차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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