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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 동북군 이끈 장쉐량, 일 관동군에 저항 한 번 않고 ‘백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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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3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32〉 

만주국 집정(執政) 취임식을 마친 푸이. 1932년 3월 9일, 만주국 수도 창춘(長春). [사진 김명호]

만주국 집정(執政) 취임식을 마친 푸이. 1932년 3월 9일, 만주국 수도 창춘(長春). [사진 김명호]

1931년 2월, 베이징 협화의원(協和醫院)에 입원한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은 3개월 만에 건강을 되찾았다. 퇴원과 동시에 중앙정부 소재지 난징(南京)으로 갔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와의 회담은 물론, 국가의 통일과 평화를 기원하는 연설로 갈채를 받았다. 5월 20일 난징을 떠날 때는 장제스가 직접 공항에 나와 베이징으로 떠나는 30세의 청년 원수 장쉐량을 배웅했다. 1주 후, 장쉐량도 환대에 보답했다. 광둥(廣東) 토벌에 나선 장제스에게 항공기 20대를 선물로 보냈다.

병력 40만 명 동북군은 중 최강 부대  

일본군은 부대 이동 시 게이샤(藝妓)를 동원해 군인의 사기를 높이는 전통이 있었다. [사진 김명호]

일본군은 부대 이동 시 게이샤(藝妓)를 동원해 군인의 사기를 높이는 전통이 있었다. [사진 김명호]

베이징으로 돌아온 장쉐량은 고열에 시달렸다. 독일 의사가 입원을 건의하자 소리 꽥 지르며 거절했다. 6월 1일 새벽, 혼수상태에 빠진 장쉐량을 태운 승용차가 순승왕부(順承王府)를 빠져나왔다. 동북군 장갑차와 기관총부대가 협화의원을 봉쇄했다. 장쉐량의 부인과 동생, 3명의 심복 외에는 병원 출입을 금지했다. 의사들의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의사 한 명을 몽둥이 찜질하자 다들 입을 닫았다.

장쉐량의 완치는 또 3개월이 걸렸다. 건강이 회복된 장쉐량은 온몸이 근질거렸다. 9월 18일 황혼 무렵, 품위 있는 부인과 공개된 애인 데리고 메이란팡(梅蘭芳·매란방)의 경극(京劇)을 보러 갔다. 공연이 무르익을 무렵 부관이 달려왔다. “관동군이 북대영(北大營)을 공격했다.” 장쉐량은 왕부로 돌아왔다. 전화로 동북변방군(東北邊防軍) 참모장에게 지시했다. “무기를 무기고에 안치해라. 국가를 위해 희생해라. 천둥소리가 클수록 비는 많이 내리지 않는 법이다.” 싸우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는 의미였다.

북대영은 동북군 7여단 주둔지였다. 여단 참모장 자오쩐판(趙鎭藩·조진번)이 구술 회고를 남겼다. “1931년 9월 18일 밤, 여단 숙소에서 잠을 자던 중 고막이 터질 것 같은 포성에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10시20분이었다. 5분 후 남만주철도의 남만역(南滿驛) 부설 여관에 관동군이 설치한 포병진지의 일본군이 북대영 쪽으로 사격을 퍼부었다. 여단장 왕이저(王以哲·왕이철)는 부재 중이었다. 일본군 보병이 탱크의 엄호를 받으며 북대영으로 오고 있다는 정보참모의 보고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동북변방군 총참모장 룽쩐(榮臻·영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항을 불허한다. 국가를 위해 살신성인(殺身成仁)하라는 황당한 지시에 당황했다. 11시 즈음, 사방에서 총성이 울렸다. 룽쩐이 전화로 상황을 물었다. 적이 서, 남, 북, 3면에서 공격한다고 보고하자 동쪽으로 이동하라고 지시했다. 날이 밝자 룽쩐은 백기를 들고 투항했다.”

압록강을 건너 동북에 진입한 조선군이 첫발을 디딘 안둥(지금의 단둥)의 당시 모습. [사진 김명호]

압록강을 건너 동북에 진입한 조선군이 첫발을 디딘 안둥(지금의 단둥)의 당시 모습. [사진 김명호]

9·18사변 당시 관동군 병력은 1만 2000명 정도였다. 관동군을 지원한 조선군까지 합쳐도 2만이 채 안 됐다. 장쉐량이 지휘하는 동북군은 40만이었다. 동양 최대 규모의 동북병공창에서 생산한 무기로 무장한 육해공군을 완벽하게 갖춘 중국 최강의 부대였다. 관동군에게 저항 한 번 못하고 동북을 포기한 장쉐량은 무저항장군(無抵抗將軍)이라는 오명(汚名)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선양(瀋陽)주재 일본 총영사는 전형적인 직업외교관이었다. 관동군 사령관에게 부대이동을 중지하라고 경고한 적이 있었다. 북대영을 공격하자 조정에 나섰지만 관동군 참모들은 막무가내였다. 외무성에 보고하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만철 전 구간에, 군대가 동시에 출동했다. 관동군의 독단과 불법 행동을 저지할 힘이 없다.” 9월 19일 새벽, 관동군은 선양을 완전히 점령했다. 랴오닝(遼寧)성 성장을 구금하고 관동군 사령관이 서명한 포고문을 발표했다. 어쩔 수 없는 군 출동이니 이것도 안심하고, 저것도 안심하라는, 그렇고 그런 내용이었다. 이날 오전, 육군상 미나미 지로(南次郞)가 내각 긴급회의 결정을 관동군 사령관에게 전문으로 지시했다. “사태를 확대하지 마라. 만주 전역 점령을 불허한다. 정부와 유사한 기구의 성립을 엄금한다.” 조선군 사령관도 본국의 지시를 무시했다. 공군 2개 중대와 20사단, 19사단 일부를 동북에 파견해 관동군을 지원했다.

19일 밤, 관동군 참모들이 사태 해결을 위한 토론회를 열었다. 입장이 같다 보니 의견 일치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지린(吉林)성과 하얼빈(哈爾賓)으로 진군한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부의)를 영입해 만주에 새로운 국가를 수립한다.” 참모들은 텐진(天津)에 있는 푸이와 접촉을 시도했다. “지방행정은 치안유지에 한정하라”는 육군성의 훈령과 “본래의 임무에 충실하며 사태의 변화에 대비하라”는 참모본부의 지시는 무시했다. 이쯤 되면 완전 하극상이었다.

관동군 참모들, 일 육군성 지시 무시

동북이 풍전등화였던 9월 18일 밤, 장제스는 장시(江西)성 후커우(湖口)의 군함에서 홍군 포위 작전을 지휘하고 있었다. 관동군의 북대영 공격을 알 턱이 없었다. 19일 오후 하선한 후에야 상하이에서 보낸 전보를 보고 동북에 사건이 터진 줄 알았다. 내용도 간단했다. “도쿄의 소식통에 의하면 동북군이 남만주 철도의 철로를 폭파했다.”가 다였다. 이 정도면 흔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장쉐량에게 전문을 보냈다. “일전에 지시한 대로 일본군에 대응하지 마라. 반격할 경우 전쟁을 일으킬 빌미를 준다.” 장쉐량의 답전을 본 장제스는 경악했다. 전화로 호통을 쳤다. “일본군이 걸어오는 사소한 도발에 대응하지 말라는 지시를 잘못 이해했다. 계획된 전면 도발을 총 한 방 쏘지 못했으니 공산 비적들에게 선전거리만 제공했다.”

장제스의 예측이 적중했다. 사경을 헤매던 공산당은 장쉐량의 무저항에 만세를 불렀다. 호재도 이런 호재가 없었다. 대도시의 지하당원들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진부(眞否)를 식별할 수 없는 온갖 소문이 떠돌았다. 시위가 줄을 이었다. 장제스와 장쉐량을 비판하는 학생들이 총리 대행인 외교부장 왕정팅(王正廷·왕정정)의 집무실에 난입했다. 말이 필요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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