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명품 연필 파버-카스텔, 와인 명가와 결합해 전통 이어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93호 27면

와글와글

파버 카스텔은 1761년에 창립해 현재 9대째 가족경영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은 파버 카스텔의 제품. [사진 위키피디아]

파버 카스텔은 1761년에 창립해 현재 9대째 가족경영을 이어가고 있다. 사진은 파버 카스텔의 제품. [사진 위키피디아]

축구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프랑크 리베리를 기억한다. 프랑스 국가대표로 활약했으며, 네덜란드 출신 아리엔 로벤과 함께 ‘로베리 라인’으로 바이에른 뮌헨을 유럽 정상에 올려놓았던 스타였다. 12년간 몸담았던 뮌헨을 떠나게 됐을 때 그는 눈물을 흘리며 “미아 산 미아(mia san mia)”라고 외쳤다. 그의 모국어인 프랑스어가 아니고 라틴어도 아닌 독일 바이에른 지방의 사투리였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다!”

미아 산 미아는 클럽의 응원가이며, 바이에른 정신을 응축한다. 뮌헨은 축구와 자동차 기업 BMW,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와 오페라를 자랑한다. 자부심 강한 바이에른에서도 프랑켄의 기질은 더 유별나다. 현대의 프랑켄은 행정적 개념은 아니고 역사적, 문화적 개념이다. 바이에른 북부와 인근 다른 주 일부가 포함되며 로만틱 가도에 있는 뷔르츠부르크, 2차대전 전범재판이 열렸던 뉘른베르크 같은 도시들이 있다.

와인·은행업 카스텔, 27대째 가족경영

프랑켄은 소시지와 미식 못지않게 와인이 유명하다. 독일의 와인 생산지는 모젤, 바덴, 라인가우, 라인헤센 등 프랑스와 가까운 서쪽에 집중돼 있는데 프랑켄은 동쪽에 떨어져 있으며, 독일 내 13개 와인 생산지 중 여섯 번째로 규모가 크다. 프랑켄 와인 맛은 몰라도 ‘복스보이텔’(Bocksbeutel)이라 불리는 독특한 병을 기억하는 이들이 많다. 둥글고 넓적한 수통 비슷한 복스보이텔 이름은 숫염소 고환 유래설과 기독교 성가와 기도자료를 덮어씌운 주머니 유래설로 팽팽히 맞선다.

붉은 포도주가 생산되기는 하지만 프랑켄에서 화이트와인의 비중은 80% 이상으로 뮐러-투르가우, 질바너, 바쿠스, 리슬링 품종이 재배된다. 독일 화이트 와인하면 리슬링을 연상하는 반면 질바너는 원래 오스트리아와 중부유럽에서 재배되던 품종이었다. 1659년 카스텔(Castell) 가문의 영지에 묘목을 심으면서 질바너는 처음 독일 땅에 소개된다.

복스보이스텔 병에 담긴 카스텔 와인. [사진 손관승]

복스보이스텔 병에 담긴 카스텔 와인. [사진 손관승]

카스텔은 1202년부터 백작 칭호를 얻고 뷔르츠부르크를 중심으로 포도밭과 포도주, 삼림과 은행업으로 성장해 현재는 27대째 가족경영을 이어가고 있는 전통 가문이다. 1774년에 문을 연 카스텔은행은 바이에른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금융기관이지만, 포도 재배 역사가 700년 이상 될 만큼 와인산업과 깊은 인연을 맺어왔다. 독일 내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음에도 카스텔 와인은 한국에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한 해 생산량이 약 100만 병으로 자체 소비에도 여유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2019년산 카스텔리슬링을 시음할 때 드라이하고도 쌉싸래한 특유의 맛과 상큼한 피니시가 인상적이었다면, 카스텔실바너에서는 잘 익은 복숭아와 라임 냄새가 산미와 멋진 조화를 이뤘다.

카스텔 와인을 주목하는 이유가 또 있다. 명품 필기구 파버 카스텔과의 연관성이다. 예술가와 문인들의 친구 역할을 해왔던 바로 그 연필회사다. 1883년 빈센트 반 고흐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도 언급됐다. “이 연필들은 딱 알맞은 굵기에 목공용 연필보다 부드럽고 질이 좋아. 검은색이 아름답고 특히 큰 그림을 그릴 때 아주 좋더라고.”

파버 카스텔은 1761년에 창립해 현재 9대째 가족경영을 이어가고 있다. 뉘른베르크 옆의 슈타인에 본사가 있으며 2대 회장 안톤 빌헬름의 이니셜을 따서 처음에는 ‘A.W.파버’라 불리었다. 승승장구하던 이 가족기업이 고비를 맞은 것은 1893년, 남자 상속인이 끊겼기 때문이다. 파버 가문은 딸 오틸리에를 카스텔 가문의 알렉산더 백작과 혼인시킴으로써 위기를 돌파한다. 다만 가문의 유언에 따라 재산을 승계하는 후손은 성과 회사명에도 ‘파버’(Faber)가 들어가야 한다고 정해놓았기에 새롭게 ‘파버-카스텔’ 가계가 등장하게 된다. 와인을 모태로 한 카스텔 가문과 글을 다루는 문구류의 파버 가문이 결합하였으니 ‘와글와글’한 새 출발이었다.

파버 카스텔은 연간 20억 자루의 연필, 지우개, 연필깎이, 강조할 때 쓰는 마커, 만년필과 볼펜, 색조 화장품 등을 생산하며 전 세계 800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리고 있다. 역사가 오래된 강소기업이 많은 독일이라지만 연필 같은 필기도구를 팔아서 어떻게 260년 이상 생존할 수 있을까? 한국 중소기업의 평균 수명이 12년이라는 대한상공회의소의 몇 년 전 통계자료를 떠올려본다면 더 불가사의하게 여겨진다.

장수기업, 수십년 내다보는 와인과 비슷

독일의 장수기업은 와인과 비슷하다. 와인산업은 단기간에 승부를 거는 업종이 아니다. 대개 묘목을 심어 3년이 지나면서 열매를 맺기 시작하지만 가장 좋은 열매를 맺는 시기는 수령 20년에서 40년 사이라고 한다. 최소한 수십 년을 내다보고 준비하며, 과실은 나의 시대가 아닌 다음 세대가 거둘 때가 많다. 내 당대에 끝내려는 조급함에서 벗어나 긴 호흡으로 접근해야 가능한 일이다. 2016년 작고한 8대 회장 안톤 볼프강 폰 파버-카스텔 백작도 비슷한 의견을 피력한 적이 있다. “중요한 것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해 내려오는 태도이다. 스스로를 연결고리로 여기며, 지나친 성장을 욕심내기 이전에 회사가 장기간 존속하는 방법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단기수익이 아닌 지속가능한 수익을 창출하는 것, ‘건강한 돈’이 핵심 가치라는 뜻이다. 파버 카스텔이 세계적 브랜드가 된 비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평범한 일을 비범하게 할 뿐”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베스트셀러 ‘히든 챔피언’에서 경영학자 헤르만 지몬이 강조한 것과 비슷하다. “히든 챔피언들의 전략과 리더십은 최신 유행하는 경영법이나 현대적 경영을 설파하는 구루들의 가르침보다는 오히려 전통적인 덕목과 건전한 인간의 이성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그것은 또 다른 ‘미아 산 미아’ 정신이다. 오래된 회사와 늙은 회사는 구분돼야 한다. 확실한 비전을 갖고 끊임없이 재창조한다면 그 회사는 오래되었어도 결코 늙었다고 말할 수 없다.

손관승 인문여행작가 ceonomad@gmail.com
MBC 베를린특파원과 iMBC 대표이사 를 지냈으며, 『리더를 위한 하멜 오디세이아』, 『괴테와 함께한 이탈리아 여행』 등 여러 책을 썼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