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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침체 도래 시인않는 연준의 오판, 시장 불신 키웠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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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3호 02면

세계 증시 왜 하루 만에 돌아섰나 

포장을 뜯어보니 ‘R(recession·경기 침체)의 공포’가 담겨 있었다. 미국 증시에 배달된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기준금리 인상 후폭풍이 거세다. 연준이 15일(이하 현지시간) 기준금리를 0.75%포인트(자이언트스텝) 인상한 직후 반짝 상승했던 미국 증시가 16일 급락했다. 3만 선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버티던 뉴욕 다우존스는 1년 5개월 만에 3만 선 밑으로 떨어졌고, 나스닥 지수도 4.08% 하락했다. 28년만의 자이언트스텝으로 물가가 잡힐 것이라는 기대가 하루 만에 경기 침체라는 현실로 뒤바뀐 것이다. 대체 하루만에 시장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우선 전문가들은 FOMC 직후인 15일 증시 반등세는 ‘일시적 반응’이라 분석한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의 ‘온화한 발언’이 시장에 물가가 잡힐 것이라는 안도감을 줬다는 것이다. 파월 의장은 FOMC 종료 후 진행한 기자회견에서 “다음 회의(7월)에서 금리를 0.5%포인트나 0.75%포인트 올리는 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며 경제 상황에 따라 ‘긴축 보폭’을 줄일 수 있음을 시사했다. 이번 FOMC 이전에 뉴욕 증시에 금리 인상 충격이 이미 반영됐다는 점도 일시적 반등이 나타난 이유로 꼽힌다. 신동준 KB증권 WM솔루션총괄본부장은 “6월 FOMC 이전에 시장 일각에선 1%포인트 인상 가능성이 거론되던 상황에서 시장이 예상하던 0.75%포인트 인상이 결정됐고, 경기 침체를 유발하지 않을 것이란 파월의 얘기에 안도감이 흘러 나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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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롬 파월 연준 의장

제롬 파월 연준 의장

그런데, 왜 하루 만에 방향이 바뀐 걸까. 신 본부장은 “FOMC 직후에는 시장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봤는데, 냉정하게 판단하니 경제지표가 나빠지고 있는 게 눈에 들어온 것”이라고 말했다. 연준은 이번 FOMC 경제전망을 통해 올해 미국 실질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을 2.8%(3월 전망)에서 1.7%로 낮췄다. 올해 미국의 개인소비지출(PCE) 인플레이션 상승률 전망도 기존 4.3%에서 5.2%로 올려 잡았다. 수치만 놓고 보면 물가는 고공행진을 하고 성장률은 둔화하는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 지속)인 셈이다.

이를 두고 시장에선 연준이 스태그플레이션을 공식화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모하메드 엘 에리언 알리안츠 경제 고문은 트위터를 통해 “향후 예상되는 금리 수준이 올라가면서 동시에 성장률 전망치는 낮아졌다”며 “스태그플레이션 전제와 일치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즉, 연준이 그동안 금리를 인상할 때마다 장담한 ‘연착륙’(경기침체 없이 물가 안정)이 물 건너 간 게 아니냐는 인식이 확산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연준의 금리 인상에 따른 경기 침체는 이미 다수의 전문가들이 우려하던 일이다. 시카고경영대학원의 이니셔티브온글로벌마켓(IGM)이 지난 12일 경제학자 49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0%가량이 내년에 미국 경제가 침체에 빠질 것이라 예상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세계은행(WB)도 지난 7일 ‘세계 경제 전망’ 보고서를 통해 스태그플레이션 위기를 경고하고, 올해 세계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4.1%(1월 전망치)에서 2.9%로 낮춘 바 있다. 데이비드 맬패스 세계은행 총재는 “우크라이나 전쟁, 중국 봉쇄, 공급망 붕괴 등의 위협이 세계 경제 성장을 망치고 있다”며 “많은 국가에서 경기 침체를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연준은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파월 의장은 심지어 자이언트스텝을 밟은 15일에도 “광범위한 경기 둔화 신호는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반적인 경제지표는 파월의 판단과는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16일 발표된 5월 미국 주택 착공건수는 전월 대비 14.4% 감소했고, 5월 소매판매(소비)는 전월 대비 0.3% 줄었다. 미시간대학 소비자심리지수는 6월 예비치가 사상 최저치로 추락했다. 폼 포셀리 RBC 캐피탈마켓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CNBC에 “경기 둔화의 증거가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는데 파월 의장의 발언은 이런 지표들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연준의 시장 판단이 틀렸다는 비판이다. 이에 대해 미국 매체인 폴리티코는 “연준의 빛나던 명성이 시험대에 올랐다”고 평가했다.

파월과 연준의 판단 미스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20년 물가 급등에 대한 전문가들의 우려가 잇따랐지만, 연준은 ‘일시적’이란 입장을 고수하며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않아 실기(失期)했다는 비판에 직면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파월의 잦은 말 바꾸기도 시장 신뢰를 떨어뜨리고 있다. 파월 의장은 5월 FOMC에서 “0.75%포인트 인상은 고려하고 있지 않다”고 언급했지만 한 달 뒤 열린 회의에서 자이언트스텝을 밟았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2월에는 “경기 침체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평가했으나 얼마 안 가 이런 입장에도 변화를 내비쳤다. 경제 상황이 바뀔 수는 있지만, 결과적으로 ‘세계 경제 대통령’으로 불리는 연준 의장의 판단에 대한 의구심이 커져가는 게 문제다.

“시장은 연준의 정책 실수를 걱정”

한스미켈슨 웰스파고 신용전략가는 “5월 FOMC 회의 당시에도 0.75%포인트 금리 인상은 고려 중이 아니라고 말한 파월 의장의 발언에 시장은 3% 상승했고, 이후 라파엘 보스틱 애틀랜타 연방준비은행 총재가 9월 금리 인상 중단 가능성을 언급하자 시장은 또 다시 올랐다”며 “연준의 논평은 시장에 불필요한 변동성만 불러 일으켰고, 신뢰의 상실을 초래했다”고 지적했다.

연준의 신뢰 상실은 그 자체로 세계 경제에 중대한 위험요인이 된다. 특히 40여년 만에 수면 위로 떠오른 스태그플레이션 대처에 큰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어느 때보다 연준의 리더십이 필요한 시점인데, 되레 시장의 불안감만 키우고 있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럽키 포워드본드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워싱턴포스트(WP)에 “한 번 신뢰를 잃은 후에는 신뢰를 회복하기가 매우 어렵다”며 “연준은 인플레이션을 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연준이 경제를 절벽으로 보낼 정도로 금리를 올려도 물가 상승률이 낮아질지 불분명하다”고 우려했다.

LPL파이낸셜의퀸시 크로스비 수석 전략가는 이날 CNBC에 “시장이 걱정하는 것은, 심지어 경기 침체에 이르기도 전에 연준이 무언가를 망가뜨릴 정책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11월 중간선거 앞둔 바이든, 인플레 잡으려 정유·해운사 압박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6일(현지시간) 해상선적개혁법안에 서명했다. [AP=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6일(현지시간) 해상선적개혁법안에 서명했다. [AP=연합뉴스]

미국의 조 바이든 행정부도 휘발유 가격 상승 등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압박 요인을 떨쳐내는 데 연일 사활을 걸고 있다. 명분은 민생고를 경감하는 것이지만 속내는 복잡하다.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외신들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은 14일(이하 현지시간) 엑손모빌·셸·셰브런 등 7개 정유 기업에 직접 편지를 보내 휘발유 등의 공급 확대를 촉구했다. 미국 내 소비자 휘발유 평균 가격은 1갤런(3.78리터)당 5달러(약 6422원)가 넘는 등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그러자 어느 나라보다 시장경제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미국에서 대통령이 기업을 압박하고 나선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의 시장 압박은 이뿐 아니다. 16일엔 해운 업체들이 화물을 실을 공간이 있음에도 선적을 부당하게 거부하는 행태를 저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해상선적개혁법안’에 서명했다. 각종 상품 가격에 반영되는 물류비를 줄이도록 기업들을 압박하려는 것이다. 일련의 행보에서 바이든 행정부의 초조함이 드러난다. 지난달 미국의 소비자물가지수(CPI)는 41년 만에 최고 상승률(8.6%)을 기록했다. 서민들의 생활비 부담이 그만큼 커졌다. 이런 가운데 미국은 5개월 뒤인 11월 중간선거를 치른다. 물가를 잡지 못하면 선거 결과는 바이든 행정부에 치명타가 될 수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이미 낮은 지지율로 고전 중이다. 여론조사업체 파이브서티에이트에 따르면 10일 취임 507일째를 맞은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율은 40.2%로, 2018년 같은 시점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율(41.5%)보다 낮았다. 트럼프의 공화당은 그해 중간선거에서 졌고, 트럼프는 2년 뒤 재선에 실패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특히 경제 정책에 대한 지지율이 낮아 인플레이션을 해결하지 못하면 트럼프와 같은 결과를 맞을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달 31일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과 만나 “인플레이션 문제 해결을 위해 연준의 독립성을 보장하겠다”고 말한 이유도 이런 상황을 고려한 때문으로 풀이된다.

인플레이션을 넘어선 스태그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의 공포가 엄습하자 바이든 대통령은 “경기 침체가 피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라며 여론 달래기에 나섰다. 그는 16일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강조하면서 “우리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인플레이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강력한 위치에 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국민들이 인내심을 지키도록 독려하는 대통령의 이런 발언 자체가 현 상황에 대한 높은 위기감을 그대로 반영한 게 아니냐는 지적도 일부 외신을 통해 나오고 있다. NPR은 “경제학자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바이든 대통령은 경기 침체가 불가피하지 않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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