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턴테이블에서 타자기로, 물처럼 흐르는 음악과 독서의 문장[BOOK]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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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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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악서총람
장정일 지음
마티

물은 물리적으로 100℃ 이후 기체로 변하면서 용적이 1650배가 되며, 화학적으로는 어떤 물질보다 용해량이나 용해도가 높다. 게다가 물은 흔하며 싸다. 내가 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다 장정일의 ‘독서일기’ 때문이었다.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통해서 소동파를 알게 됐고, 소동파의 산문을 통해서 문장이 물과 같다는 뜻을 얻었다. 그래서 ‘물’에 흥미를 느꼈고, 지금까지도 문장이 물과 같다는 말을 새긴다. 문장은 짧아도 때론 엄중하고 쓰기에 따라 깊고도 넓게 가치를 확장할 수 있으며, 여러 사유를 열거하거나 섞어 사용함으로써 효과적인 표현이 가능하다. 물론 동파가 살았던 송대에는 ‘물은 H2O’라는 화학기호는 없었다. 그러나 과학 없던 시대에도 물은 물이다.

작가 장정일. '타자기, 뭉크 화집, 턴테이블'은 그의 소설 '아담이 눈뜰 때'에서 19세 소년이 가장 가지고 싶어했던 것들이다. [사진 마티]

작가 장정일. '타자기, 뭉크 화집, 턴테이블'은 그의 소설 '아담이 눈뜰 때'에서 19세 소년이 가장 가지고 싶어했던 것들이다. [사진 마티]

장정일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문단에 나타났기 때문에 진부한 표현이지만 혜성처럼 나타났다. 유난히 불행했던 그는 『햄버거에 관한 명상』으로 시작해서 몇 권의 시집을 발표하면서 희곡과 장편 소설을 썼으며 연이어 출판한 『아담이 눈뜰 때』, 『너에게 나를 보낸다』,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내게 거짓말을 해봐』는 모두 영화 계약이 되어 완성됐다. 영상이 새로운 물결로 문화를 압도하던 시기에 드문 풍경이었다. 젊은 날 그가 이룬 명성은 그렇게 대단했다. 이후 삼국지를 번역했으며, 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기도 했다.

혜성처럼 나타난 그, 충격의 사건

장정일의 이력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은 그가 발표한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라는 작품이 음란물 판정을 받아, 형사처벌 대상이 되었던 일인데,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와 함께 한국 사회가 감당하는 표현의 자유가 어디까지인지를 드러낸 어두운 사건이었다. 이 무리한 형벌을 계기로 장정일은 호기로운 작품활동은 멈추었고 독특한 집필을 이어왔는데, 그는 책을 읽고 읽은 책에 관해서 쓰기를 멈추지 않고 이어왔다. 중간에 시나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바짝 엎드려 읽었고, 쓸 뿐이다.

『신악서총람』은 10여 권에 이르는 독서일기 중 음악 관련 서적이나 어떤 책에 담긴 음악의 수사학을 직관하는 책이며, 이런 책으로는 2015년 『장정일의 악서총람』 이후 두 번째이다. 보통 이런 익숙한 콘셉트는 시간이 더해감에 따라 종종 성실이 결여하거나 완성도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세상의 관심은 덜해져도 매너리즘을 극복하는 장정일의 문장은 그래서 값지다.

모방불가 주관의 음악 인문학, 사회학

장정일의 『신악서총람』에는 흥미진진한 정보를 종횡무진하며 흉내 낼 수 없는 주관이 펼쳐지는데, 이는 쉽게 말하면 음악 사회학, 음악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음악을 이야기도 하지만, 장정일이 쓰는 음악은 분명 한계가 있다. 각각 저자가 쓴 텍스트 속에 의미의 연장선에서만 음악은 논의된다. 가령 스탄 게츠와 쳇 베이커가 함께 활동하는 시기를 책에서 풀어낸 내용을 읽고 자신의 들었던 음반에서 확인하는 식이다. 그래서 가끔은 “인터플레이(교감연주)가 없다”라는 말이 각각의 책보다 직접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음악가의 삶이 음악에 미치는 영역, 음악이 오락을 넘어 사회적·정치적·철학적 가치를 추종할 때, 그런 묵직한 주제가 음악을 듣는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사소하지만 중대한 감상 때문에 ‘악서’는 한결같이 외친다. ‘음악을 들어야 한다’고 말이다. ‘악서’에 관한 ‘악서’ 역시 음악을 듣게 하는 매력이 있다. 『신악서총람』을 통해 ‘악서’를 펼쳐도 좋지만, 음악만 들어도 어수선한 마음이 얼추 추슬러진다.

『신악서총람』의 외피를 비켜서 내피를 들여다본다. 내용을 외피라고 한다면 문장은 직접은 드러나지 않는 내피와 같다. 그가 내게 알려주었던 소동파의 문장이 장정일의 문장에서 재현되고 있는지 궁금했다. 동파가 ‘문장은 가득 차서 넘친다’라고 했다. 문장은 쥐어 짜내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써지는 것이다. 동파의 문장은 초기에 형식적 완성에 매달렸으나, 후기에는 그 형식을 벗어나서도 아름다워졌다.

저자 서문이 없는 '신악서총람' 

나는『신악서총람』에서 문장가로서 장정일을 새겨보았다. 그는 자신의 의견을 쓰기도 하고, 쓰지 않기도 한다. 한 잡지에 연재할 때 기승전결의 형식을 일정 부분 취하다가 또 그걸 깡그리 무시하기도 한다. 어떤 현상을 한없이 객관적으로만 느슨하게 쓰기도 하고 한마디로 정형화하기도 한다. 평소 나는 그런 정형화를 몹시 싫어하는데, 장정일이 쓴 정형화는 부드럽게 읽힌다. 장정일이 쓴 정형화가 꼭 맞아서가 아니라 장정일이 쓴 전체의 글에 천천히 스며들어 어울리기 때문이라는 걸 겨우 알았다. 물은 형태를 갖추지 않고 흘러서 외부의 형태에 언제나 스스로 맞춘다.

문학을 했던 작가로서 그는 거칠게 한 시대를 풍미했다. 그가 비수를 숨기고 아득한 길을 구부리고 있지만 오래는 가지 않을 것이다. 가득 차면 넘치는 것처럼 넘쳐서 흐를 것이다. 다만 그가 채우고 있는 물동이가 언제 가득 찰지는 모른다. 책을 상재할 때 저자는 흔히 서문을 쓴다. 『신악서총람』에는 서문이 없으며, 엮은이의 말만 있다. 이는 장정일 스스로가 이 책이 자신의 본령이 아님을 보인 단서다. 그의 서문이 기다려진다. 물의 물리적 변화처럼 넘쳐 세상을 채우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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