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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이해 키워드 30] <조화의 시대> 한국과 중국이 함께 웃을 이야기를 짜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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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들어 중국이 굴기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국가들은 내심 큰 기대를 걸었다.

확실히 당대 중국은 일개 민족국가의 위상을 벗어나 과거 중화제국이 경영했던 여러 치리(治理)와 국책 사업을 전개하며 명실상부 현대판 제국의 위용을 과시하고 있다.

후진타오 정부가 중화 문명과 사회주의 이념을 결합하여 한층 업그레이드된 문명의 지표를 보여주고자 했을 때, 필자는 중국이 ‘부흥의 길’(2007년 다큐멘터리 제목)을 통해 고대 제국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리고 이 자원을 승계한 시진핑 정부가 중국몽(中國夢)을 천명하고 일대일로(一帶一路)를 기획했을 때, 필자는 바야흐로 21세기 중화 실크로드의 시대가 열릴 것으로 기대했다.

일대일로 [사진 셔터스톡]

일대일로 [사진 셔터스톡]

‘조화사회’에서 ‘중국몽’으로 넘어가던 과도기에, 중국학자들은 미래 중국을 상상하며 여러 청사진을 내놓았다. 혹자는 중국모델이 쇠락한 미국과 패망한 소련을 대체할 제3의 대안이 될 것으로 믿었다. 혹자는 세계자본주의와 미국 패권주의를 극복하는 전제를 지닌 아시아 국가들의 새로운 연맹체를 구상했다. 또 다른 학자는 2차대전 이후 유럽에 EU가 수립된 것처럼 오늘날 동아시아도 공동정부가 출범할 때가 무르익었다고 주장했다.

특이한 점은 이들이 중국의 미래를 상상하면서 동시에 동아시아공동체 구상을 함께 거론한다는 것이다. 일개 민족국가로 운영되기에는 규모와 역량 면에서 이미 팍스 차이나의 궤도에 오른 시대에, 중국에 절실히 필요한 것은 공교롭게도 고대 제국의 치리 경험이었다.

2021년 10월, 중국 광시 과학기술박물관 [사진 셔터스톡]

2021년 10월, 중국 광시 과학기술박물관 [사진 셔터스톡]

산업혁명이 시작되어 서세동점의 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지, 동아시아는 중화질서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최고의 문명을 구가했던 중화제국은 소프트파워나 하드파워 면에서 모두 동아시아 국가들을 포섭하기에 충분했다. 주변국과의 관계에서 역대 제국이 구사했던 ‘조공-책봉’ 체제는 중화질서가 위압감보다는 상호존중에 기반한다는 신뢰를 심어 주었다.

이로써 결론을 먼저 말하면 동아시아 국가들이 함께 참여해 건설했던 고대 국제질서의 모델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고 강력하다는 것이다.

현대 세계질서에는 천자(天子)도 없고 국가 간 등급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대 시기 동아시아 국가들 사이에 존재했던 성긴 듯하면서도 촘촘히 스며든 연대 의식, 전쟁 회피를 중심으로 수립되었던 외교적 관계, 상호 수혜를 원칙으로 했던 무역 네트워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나의 원천적 사유모델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렇게 찬란했던 고대의 경험과 달리, 오늘의 동아시아 현실은 녹록지 않다. 동아시아 좁게는 동북아를 아우를 수 있는 공동의 연대의식은 찾아보기 어렵다. 반대로 이념과 국익의 차이로 곳곳에 파열음이 들린다. 핵무기의 실전배치는 전쟁 회피의 방식을 완전히 새로운 차원으로 몰아갔다. 안보와 국익을 둘러싼 상이한 스펙트럼은 동북아를 동상이몽의 게임장으로 변모시켰다. 상호 수혜의 경제교류는 미중(美中) 패권의 틈바구니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나라마다 달리 각인된 역사기억도 이웃 국가의 신뢰도를 심각하게 훼손한다.

오늘 우리는 한반도와 중국 넓게는 동북아시아에서 어떻게 상호신뢰를 회복하고 ‘평화지대’를 구축할 수 있을까?

인문학자인 필자는 소박한 관견(管見)을 말할 수밖에 없다.

먼저 동북아에서 통용될 수 있는 ‘공통분모’가 있는가 찾아봐야 할 것이다. 현대 중국학자 쉬지린(許紀霖)은 동아시아공동체의 가능성을 ‘천하주의(天下主義)’에서 찾았다. 고대 주(周)의 문명 구도가 중화질서로 확대되어 수천년간 동아시아를 주도했던 원동력은 ‘문화’가 종족과 국가보다 상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오늘 동북아란 천하 무대에 필요한 것은 동북아를 넉넉히 덮을 수 있는 ‘문화’의 복원이다.

다음은 동아시아 각국이 승인한 ‘독립공간’이 존재 가능한가에 관한 것이다. 고대 한국에는 ‘소도’(蘇塗: 신성불가침 종교 성역)라는 독특한 공간이 존재했다. 어떠한 세력으로부터도 간섭받지 않는 이 성역의 전통은 근대 독재 시기 한국사회에서 명동성당과 같은 솟터로 되살아났다. 만약 동아시아 각국이 어떠한 정치적 영향력도 배제된 현대판 ‘소도’를 승인한다면, 동아시아에 새로운 의미 ‘평화지대’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한중관계

한중관계

셋째는 동아시아에서 ‘중립지대’를 어떻게 수립할 것인가에 관한 물음이다. 앞서 언급한 키워드와 다르게 이 ‘중립지대’는 자체로 이미 정치적 의미를 지닌다. 북핵(北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핵동결’에 합의할 것인가, 아니면 한반도에서 모든 쇠붙이를 몰아내고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길 것인가 등의 논의는 ‘중립지대’의 성격과 연관된다. ‘영구평화’에 목적을 둔 중립지대라면 현실의 쇠우리를 뚫고 이상의 언덕에 올라야 한다.

넷째는 필자가 가장 주목하는 ‘서사지대’를 펼치는 상상이다. 각국의 화자(話者)가 모두 참여하여 만드는 이야기(敍事)에 관한 것이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 중에는 전쟁으로 아들을 잃은 이도 있고, 갑자기 어디론가 끌려가 육체적 고통을 받은 소녀의 이야기, 만세삼창을 부르다 정신 차려보니 패망을 맞은 가족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면 공습을 피해 매일 산을 올랐던 마을 사람들. 모닥불을 쐬며 둘러앉아 이야기를 들려주며 함께 서사의 뜨개질을 하는 상상이다.

스토리텔링이 대세가 된 지구촌에서 우리는 ‘공통분모’, ‘독립공간’, ‘중립지대’ 위에 함께 울고 웃는 ‘이야기’를 짜서 얹을 필요가 있다. 함께 짜낸 옷을 입고 돌아다니다 보면 더 공감하게 되고 때론 녹아내릴 것이며 차츰 순화되어 갈 것이다.

글 강진석 한국외대 중국외교통상학부 교수 겸 국제지역대학원 중국학과 주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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