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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문소영의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

청와대의 기묘한 공간 구성도 현대 문화유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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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조선과 현대가 섞인 청와대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지난달 말부터 일반 개방된 청와대 본관 내부는 재미있는 혼종성의 공간이다. 천장이 드높은 홀과 붉은 카펫이 깔린 중앙계단은 유럽의 궁전과 관공서에 흔한 양식인데, 계단 옆의 기둥은 한옥 양식을 흉내 낸 모습이다. 천장은 옛 우리 궁궐·사찰의 우물천장인데 조명은 샹들리에다. 게다가 중앙계단의 샹들리에는 한옥 공포(栱包) 모양이면서 유럽식 크리스털 프리즘을 빼곡히 달았다. 벽에는 신라 금관 모양에 크리스털을 단 조명도 있다.

세종실(국무회의장)에는 샹들리에가 드리워진 너머로 송규태 작가의 ‘일월오봉도’가 펼쳐져 있다. 간담회와 소규모 연회 장소인 인왕실, 대통령의 집무실과 접견실, 영부인실에도 샹들리에가 달려있는데 모양이 각기 다르고 정교해서 보는 재미가 있지만 대체 왜 이렇게까지 샹들리에에 집착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 창문은 한옥 문살에다 전통 휘장인 방장(房帳)을 드리우고 매듭이 아름다운 유소(방장걸이 끈)를 달았다.

금테 콘센트, 신라 금관 샹들리에
유럽풍·한국식, 권위·민주의 ‘짬뽕’
한국 현대문화사 엿보는 재미도
스토리텔링 공간으로 거듭나야

유럽에 대한 동경과 민족 자존심

한옥에서 모티프를 얻은 샹들리에와 기둥. 계단 위로 김식의 ‘금수강산도’(1991) 일부가 보인다. 문소영 기자

한옥에서 모티프를 얻은 샹들리에와 기둥. 계단 위로 김식의 ‘금수강산도’(1991) 일부가 보인다. 문소영 기자

한마디로 서구적 공간에 한국적인 것을 넣기 위해 애를 썼는데, 그 결합은 성공적인 것도 있지만 우스꽝스러운 것도 적지 않다. 웃음을 유발하는 또 하나의 디테일은 모든 콘센트와 스위치에 화려한 황금색 테두리를 둘렀다는 것이다. 이것이 드높은 천장과 수많은 샹들리에와 조선 궁궐 모티프와 어우러져, 과거 유럽 제국에 대한 동경과 민족적 자존심이 엉켜있는 나라의 지도자가 쓸 법한 공간을 매우 권위주의적인 분위기로 완성하고 있다.

청와대 본관 인테리어의 혼종성에 대해 최범 디자인 평론가는 “절충주의 양식(Eclecticism)이다. 세종문화회관 등 20세기 한국 공공건물에 공통으로 나타난다”라고 말했다. 청와대 본관은 1991년 노태우 정부 시절 원래 있던 건물을 허물고 정림건축의 설계로 신축한 것이다.

신라 금관 조명. 문소영 기자

신라 금관 조명. 문소영 기자

국무회의장에 걸려있는 ‘일월오봉도’를 가리키며 최 평론가가 말했다. “국민이 주권을 갖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조선의 왕과 전혀 다른 존재인데, 대통령을 제왕처럼 만들어버리는 이미지다. 그뿐만 아니라 청와대 전체가 조선의 이미지에 지배되고 있다. 이것은 소수의 의사결정권자나 디자이너의 발상보다도 한국인 전체의 의식을 반영한다. 몸은 대한민국에서 살지만, 의식과 이미지는 아직 조선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최 평론가의 말처럼 조선 이후 한 세기가, 청와대 본관이 지어진 후에도 30여 년이 흘렀건만 우리는 여전히 대통령을 임금에 비유하고 시민을 백성에 비기는 글과 이미지를 수없이 볼 수 있다. 최 평론가는 말한다. “이마골로지(imagology)라는 말처럼 시각적인 것이 의식을 지배한다. 그래서 인습적인 이미지와 공간으로부터 때로 주체적인 단절을 감행할 필요가 있다. 옛 전통을 존중하는 것과 그것을 현재와 혼동하는 건 다른 문제다. 대통령 집무실의 용산 이전은 드디어 조선적인 것에서 벗어났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비록 새 집무실은 아무런 개성이 없지만.”

우리 스타일을 찾는 과도기적 공간

세종실에 있는 송규태의 ‘일월오봉도’(1991)와 샹들리에. 문소영 기자

세종실에 있는 송규태의 ‘일월오봉도’(1991)와 샹들리에. 문소영 기자

그렇다면 청와대 본관의 절충주의 양식은 구시대의 퇴물일 뿐일까. “장기적 관점에서 우리의 스타일을 찾아가는 과정, 시각적인 ‘나라 만들기(nation building)’의 과정을 잘 보여준다. 이러한 과정의 역사는 보존되고 연구될 필요가 있다”라고 최 평론가는 말했다. 사실 기자는 청와대 본관을 둘러보면서 유럽식과 조선식 인테리어의 진지하고도 때때로 우스꽝스러운 결합이 오히려 ‘무척 한국적’이라고 느꼈다. 세계적인 미술가 최정화가 말한 대로 한국 현대문화의 중요한 특성 중 하나가 ‘짬뽕’ 아니겠는가. 문화사·미술사의 중요한 유산으로 보존할 필요가 있다.

청와대 본관의 혼종성은 여러 색깔이다. 권위주의적인 공간이면서도 국가 지도자의 국민 눈치 보기 또한 공간에 스며 있다. 온통 벽화와 부조와 대리석 무늬로 빼곡한 유럽의 궁전과 관공서 공간에 비해 청와대 내부는 장식이 절제됐다. 또한 600~700여 점의 소장 미술작품의 경우에도 거장의 작품도 있긴 하지만 대다수는 평범한 작품이며 옛 그림의 모사본도 있다. (정준모 한국미술품감정연구센터 대표) 정 대표는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실장(1996~2005년)으로 근무했는데, 1998년 김대중 정부 시절 청와대 소장 미술작품 첫 전수조사에 참여했다. 청와대 내부에 설치한 작품을 큐레이팅했으며, 이후에도 소장품 자문에 참여했다.

인왕실에 있는 전혁림의 ‘통영항’과 샹들리에. 문소영 기자

인왕실에 있는 전혁림의 ‘통영항’과 샹들리에. 문소영 기자

정 대표에 따르면 청와대 컬렉션 중에는 장우성·김기창·이상범 등 한국화가들의 그림과 ‘물방울 화가’ 김창열과 ‘농원의 화가’ 이대원의 유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직접 구입해 화제가 됐던 전혁림 작가의 가로 7m 크기의 대작 ‘통영항’ 등 중요한 작품들이 있으나 그 외에는 대체로 “아쉬운 수준”이다. 그는 “10여년 전 청와대의 인테리어와 작품 수준은 1970~80년대 강남 주택 수준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지금도 딱 그렇다”고 말했다. 예산이 매우 적고, 작품 구매와 전시를 담당하는 전문가도 따로 없었으며, 무명작가가 일방적으로 작품을 보내오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작품의 정확한 목록조차 아직 정리·공개된 적이 없다.

창문에 드리워진 전통 방장과 유소(방장걸이). 문소영 기자

창문에 드리워진 전통 방장과 유소(방장걸이). 문소영 기자

지금 청와대 소장 작품은 대부분 수장고로 옮겨졌다. 청와대 본관에 남아있는 그림은 인왕실에 걸린 ‘통영항’을 제외하고는, 중앙계단에 설치된 김식 작가의 ‘금수강산도’ 등 1991년 청와대 본관이 준공될 때 커미션워크로 설치된 것이다. 한편 지금 청와대 춘추관에 남아 있는 미디어아트 거장 백남준의 TV 83대 설치 작품 ‘비디오 산조(散調)’는 1990년 춘추관 준공 당시 기증받은 것으로 청와대 소장품 중 최고가로 추정되는데, 전기세를 낭비한다는 구설에 오를까 봐 잘 켜지 않았다는 슬픈 사연이 있다.

“새 대통령실, 그림 사지 말고 빌려라”

정 대표는 “청와대 내부에 전담 큐레이터가 없다. 국민 세금을 낭비한다는 비판을 의식한 까닭인지 컬렉션의 수준이 높지 않다. 전문지식을 갖춘 담당자가 필요하다. 앞으로 대통령실은 작품을 사지 말고, 국립현대미술관 등에서 작품을 대여하는 게 낫다”라고 조언했다.

스위치와 콘센트의 금테두리. 문소영 기자

스위치와 콘센트의 금테두리. 문소영 기자

그렇다면 일반 국민에 개방된 청와대 공간은 어떻게 활용해야 할까. 문화계 전문가들은 일단 본관과 관저는 지금의 인테리어 디자인과 가구를 간직해서 역사박물관으로 활용하거나, 내부 원형을 유지하면서도 공예·디자인 전시를 하는 박물관으로 이용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다른 건물과 공간의 활용 방안에 대한 의견도 잇따르고 있다. 역사박물관, 클래식 콘서트홀, K팝 공연장, 도서관 등등이다. 정 대표를 비롯해 미술계 인사 770여 명이 참여한 ‘국립근대미술관을 원하는 사람들의 모임’은 춘추관·경호동·위민관·녹지원 등을 근대미술 전시장으로 활용하자는 쪽이다.

무엇이 됐든 핵심은 청와대라는 역사적인 장소에 대한 면밀한 연구, 보존과 활용의 균형을 찾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후속 작업을 이끌어갈 부처가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현재 청와대 관리는 문화재청이 맡고 있지만, 각 유물을 조사하기 위해서는 대통령 관리비서관실과 일일이 협의해야 한다. 청와대의 미래에 대한 마스터플랜 담당기관도 아직 없다. 청와대 개방의 성공 여부는 눈앞의 흥행이 아니라 미래 활용에 달렸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