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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성탁의 시선

반도체 인력난, 대학 학과 구조조정으로 풀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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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성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성탁 논설위원

김성탁 논설위원

 서울 한 사립대의 영어영문학과 정원은 100명가량이다. 30년 전 정원에서 큰 변화가 없다. 이 대학에는 최근 반도체 등 차세대 산업 관련 학과가 새로 생겼다. 선발 인원은 30명 수준이고 정원 외로 뽑는다. 웬만한 해외 어문학 관련 학과의 정원보다 적다. 서울 다른 대학들의 사정도 비슷하다. 새로운 기술 분야를 연구하는 학과 신설은 가물에 콩 나듯 하고, 기존 학과의 틀이 수십 년째 이어지고 있다. 지방 거점국립대 역시 인공지능(AI)이나 반도체 관련 신설 학과가 있더라도 전통적인 학과보다 정원이 적은 경우가 많다.

 대학 정원을 따져본 것은 최근 반도체 등 신산업 관련 인력 부족에 대한 대책 마련이 국가적 과제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가 어제 발표한 경제정책 방향에는 반도체 인력 충원과 AI·바이오·로봇 등 유망 산업 인프라 구축 방안 등이 담겼다. 반도체 전문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특성화 대학을 지정하고, 정원 확대 방안도 마련키로 했다. 하지만 "수도권 대학에 배정하면 지방대는 고사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진작 터져 나왔다.

 장상윤 교육부 차관(왼쪽)이 지난 15일 정부세종청사에서 반도체 등 첨단산업 인재양성 특별팀 제1차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연합뉴스

장상윤 교육부 차관(왼쪽)이 지난 15일 정부세종청사에서 반도체 등 첨단산업 인재양성 특별팀 제1차 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연합뉴스

 대학들이 신산업분야 학과를 유치하거나 관련 정원을 늘리려 드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학과 졸업생은 취업도 잘 될 테니 학생에게도 좋은 일이다. 문제는 저출산·고령화 등으로 대학에 진학할 인구가 급감하고 있다는 점이다. 벚꽃 피는 순서대로 대학이 문 닫을 것이라는 말이 현실화할 조짐이다. 2024년에 지방대의 34%가, 2037년에는 84%가 정원의 70%를 채우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한 연구도 있다. 이런 지경이라 수도권 대학 정원 총량을 늘리지 못하게 한 관련 법에 특례를 두는 식으로 밀어붙이는 건 무리다.

 반발이 나오자 한덕수 국무총리가 “수도권과 지방에 비슷한 수준의 증원을 생각하고 있다”고 무마에 나섰지만 이 역시 해결책이 되기 어렵다. 학령인구 감소로 대학 신입생 구하기가 발등의 불이 될 판인데, 신산업 분야를 마냥 늘리기만 하면 곧 닥칠 혼란에 눈 감는 게 된다.

학과 증원 예고에 수도권-지방대 갈등
교수 반발에 학과·정원 구조조정 못해
조정 선도 대학에 예산 등 인센티브 줘야

 그래서 신기술 분야 인력을 육성하는 방안은 대학의 학과 구조조정을 끌어내는 방향과 맞물려 검토돼야 한다. 급하다고 증원만 할 게 아니라 달라진 산업 구조와 기업이 필요로 하는 인재상의 변화를 고려해 고목처럼 고착된 학과와 전공 구조에 변화를 유도할 필요가 있다. 지금도 일부 대학은 인문학과 공학을 연계하는 등 융합 전공 과정 개설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반도체 관련 학과에서 증원하기를 원하는 대학은 달라진 산업 환경과 취업 가능성 등을 고려해 다른 학과의 정원을 탄력적으로 조정해야 한다.

 국내 대학이 기존 학과의 틀을 허물지 못한 데에는 교수 사회의 책임이 크다. AI 등 첨단 기술을 활용하는 혁신 기업들은 인류의 언어와 문학, 역사와 철학을 탐구하는 인문학을 새 기술 개발에 적극 접목하고 있다. 그런데도 국내 대학에선 교수가 전공한 특정 분야 위주로 학과 커리큘럼이 짜이기 일쑤다. 일자리 수요를 반영해 전공별 학과 정원을 조정하는 일은 그야말로 어렵다. 정년이 보장되는 교수들이 반발하는 것은 물론이고, 직선제로 뽑히는 대학 총장들이 이런 교수들의 의견을 무시하기는 쉽지 않다.

윤석열 대통령이 용산 대통령실 청사 영상회의실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반도체 포토마스크를 보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윤석열 대통령이 용산 대통령실 청사 영상회의실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반도체 포토마스크를 보고 있다. 대통령실 제공

 새 정부가 신산업 인재 양성에 방점을 찍고 계획을 세우는 시기를 대학의 관성을 깨는 계기로 삼을 만하다. 일부 대학에선 여러 한계 속에서도 교수들을 설득해 교과 과정을 현대화하거나 학과 간 정원을 조정해왔다. 지금 대학에선 취업에 도움이 되는 학과를 복수전공하느라 학생들이 과거보다 두배에 육박하는 학점을 따는 일이 흔하다. 신산업 분야의 정원을 늘리면서 반대로 정원이 줄어 손해를 보는 학과의 교수들은 학제 융·복합 과정 등을 적극 개설해 참여토록 할 수 있다. 차제에 대학 전공 자체를 이런 식으로 개편하면 학생들도 주전공, 복수전공 대신 경쟁력 있는 융합 전공을 거치면서 진로를 탐색하고 다양한 분야의 취업에 도전할 수 있게 된다.

 “과학기술 인재를 키워내지 못하면 교육부가 개혁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윤석열 대통령의 질타에 교육부는 긴장하는 모습이다. 대학에 많은 예산을 투입하면서도 신산업 인재 양성을 이뤄내지 못했으니 당연한 지적이다. 그렇다고 교육부가 갈등이 뻔한 증원만 검토해선 곤란하다. 학과 정원 구조조정이나 융합 전공으로의 개편 등을 선도적으로 하는 대학에 예산 등 인센티브를 주는 지원사업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반도체 인력을 키우는 동시에 인구 감소 시대에 대학의 변화까지 유도하는 대안 마련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