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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인태가 고발한다

'죽음의 나선' 경고도 무시했다…테라 대폭락 피해 키운 이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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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박경민 기자

그래픽=박경민 기자

화산이 폭발하면 주변에 큰 피해가 생기지만, 땅속에 감춰져 있던 광물들이 분출되어 지질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된다. 1997년 IMF 외환위기라는 화산이 폭발했을 때는 낙후된 우리나라 금융산업의 민낯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담보 위주의 대출 관행, 관치금융, 은행과 기업의 밀착과 무모한 대출, 부실한 위험관리체계 등 한국 신용도가 추락하게 된 많은 원인이 밝혀졌다.

이유를 알게 된 후에는 금 모으기 운동까지 벌이며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뭉쳐 빠르게 문제점을 개선하였다. 빌린 돈을 3년 만에 모두 갚고 IMF 체제를 조기 졸업 할 수 있었고 금융산업도 관행에서 벗어나 체계적인 위험관리 시스템을 갖추며 선진화되었다. 무엇보다도 국제사회에 '대한민국은 믿을 수 있는 나라'라고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죽음의 나선'으로 종말 맞은 테라

테라ㆍ루나 사태 또한 디지털 자산 산업에 감춰져 있던 많은 문제점을 노출했다. 노출된 문제점을 파악하여 철저히 분석하고 개선해야 유사한 사태가 재발하지 않을 것이며, 건전하고 지속가능한 미래의 산업이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이다.

테라(UST)는 그 가치가 달러와 거의 동일하게 유지되도록 하기 위하여 루나라는 또 다른 가상화폐를 사용한다. 테라는 왕이고 루나는 왕을 지키는 근위병이다. 누구라도 1테라를 가지고 오면 시스템에서는 즉시 1달러어치의 루나를 새로 발행해서 교환해 준다. 테라의 가격하락을 루나로 전가하는 셈인데, 테라는 항상 1달러어치의 루나와 교환되고 대신 루나는 발행량의 증가로 일시적인 가격하락을 겪게 된다. 왕을 지키기 위해 일부 근위병이 희생되는 것이다. 루나의 생태계가 잘 유지되어 희생된 근위병이 빨리 대체되고 근위대가 강성하게 유지되는 한 테라는 언제나 루나로 교환될 수 있기 때문에 1달러의 가치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가 테라를 공격하면, 즉 테라에 대한 매도물량이 많아지면 근위병의 희생이 급격히 늘어나고, 그 희생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순간 소용돌이가 점점 커지다가 사라지는 죽음의 나선(Death Spiral)에 빠져 버리게 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루나의 가격이 떨어지면 테라를 바꿔주기 위해 새로 발행되는 1달러어치 루나의 양이 더 많아지고 이렇게 발행된 루나는 다시 거래소로 유입되어 루나의 가격을 더 하락시키는 악순환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거래소의 능력 부족? 모럴 해저드? 

이석우 업비트 대표가 13일 국회에서 열린 가상자산 시장의 공정성 회복과 투자자 보호대책 긴급점검 당정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코인 거래소들은 막대한 거래 수수료를 챙기면서 투자자 보호엔 손을 놓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뉴스1

이석우 업비트 대표가 13일 국회에서 열린 가상자산 시장의 공정성 회복과 투자자 보호대책 긴급점검 당정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코인 거래소들은 막대한 거래 수수료를 챙기면서 투자자 보호엔 손을 놓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뉴스1

이런 취약한 구조를 가진 테라가 세계 시총 10위권으로 국내외의 수많은 거래소에서 거래되고 있었다는 것은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거래소들의 디지털 자산 평가 및 리서치 능력이 부족하거나, 혹은 다 알고 있으면서도 거래를 지속하는 심한 모럴해저드에 빠져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로 이러한 문제에 대한 전문가들의 지적이 있었음에도 공시조차 거의 없었다.

거래소의 또 다른 문제점은 테라 매도로 루나 발행량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루나 가격이 계속 떨어지는 상황에서 드러났다. 발행한 주식의 양에 변화가 없는 일반 회사의 주가에 익숙한 투자자들은 가격이 내리면 곧 반등하는 경우를 많이 봐왔기 때문에 추격매수에 들어간다. 그러나 루나와 같이 가격이 하락할 때 발행량이 급격히 늘어나는 구조에서는 다시 상승할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10억 개 이하였던 루나 발행량이 죽음의 나선을 거치며 6조 9000억 개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추격매매에 나섰던 국내 투자자는 1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래소가 조기에 이런 문제를 공지했더라면 무모했던 소비자의 피해가 많이 줄었을 것이다.

디지털 자산을 발행할 때는 일종의 사업계획서인 백서를 발표한다. 보통 사업의 취지와 목표, 기술의 내용, 추진 일정, 관련 핵심인물 등을 기술하기에 백서는 투자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판단자료다. 거래소에 상장된 후 백서 내용과 다르게 사업이 진행될 경우 유의 종목으로 지정되거나 상장이 폐지되기도 한다.

지난 3월 한 온라인 매체에 게재된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 기사. [사진 서울와이어 캡처]

지난 3월 한 온라인 매체에 게재된 권도형 테라폼랩스 대표 기사. [사진 서울와이어 캡처]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볼 때, 테라 방어를 위해 테라를 발행한 테라폼랩스가 비트코인을 대량 구매한다는 뉴스가 나오고 실제로 8만여 개의 비트코인을 샀을 때의 대응에도 문제가 있었다. 테라 가격하락을 비트코인으로 방어한다는 이야기는 백서의 어느 곳에도 없다. 백서에서 제시한 알고리즘 스테이블 코인을 포기한다는 선언과 같고, 이는 프로젝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변경하는 것이다. 즉시 유의 종목으로 지정되어야 하고 상장폐지까지 검토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을 보인 거래소는 거의 없다.

상도의 어긋난 거래소 행태

거래소는 중개하는 물품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위험을 측정하고 프로젝트 진행 상황을 평가하여야 할 상도의적인 책임이 있다. 어떤 면에서 왜 위험한지를 구체적으로 제시할수록 좋다. 위험에 대한 본질을 이해해야 투자자들이 위험을 감수할 것인지, 아니면 투자를 철회할 것인지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면피성으로 하는 ‘위험하니 투자에 유의하세요’와 같은 안내는 실제 투자 판단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앵커 프로토콜이 제안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다. 앵커 프로토콜은 일종의 예금과 대출 서비스로, 테라를 예치하면 연 19%대의 이자를 지급하는 구조다. 고이율에 의한 역마진은 생태계의 부실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어 폰지사기(다단계 금융사기)라는 의심을 받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런 구조를 놓고 시중에서 설왕설래가 한창일 때도 대부분의 거래소에서는 무려 연 19%에 달하는 고율의 이자를 제공하는 게 가능한 일인지에 대해 아무런 안내도 없었다. 물건을 중개하는 거래소조차 알기 어렵다면 일반 투자자는 무엇을 보고 투자를 하라는 것인지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가격이 폭락했을 때의 대응에도 문제가 있었다. 가격이 폭락하는 경우 그래도 거래를 하도록 유지해야 하는지, 아니면 입금만 막아야 하는지 혹은 입출금을 모두 막아야 하는지 등등 실제로 어떤 방법이 옳았는지는 추후 연구를 통해 밝혀질 것이다. 문제는 대부분의 거래소에 가격이 폭락하는 경우 대처 방안에 대한 구체적인 매뉴얼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변동성도 크고 위험도 큰 디지털 자산을 몇 년 동안 거래해오면서 폭락할 경우에 대한 대처 방안이 체계화되어 있지 않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

사기성 코인 난립에 요원한 소비자 보호 

지난달 13일에 업비트에 올라온 루나 거래중지 안내 공지. 이미 6일부터 하락을 시작해 9~10일 99% 폭락한 지 3일 후였다. [사진 업비트 사이트 캡처]

지난달 13일에 업비트에 올라온 루나 거래중지 안내 공지. 이미 6일부터 하락을 시작해 9~10일 99% 폭락한 지 3일 후였다. [사진 업비트 사이트 캡처]

거래소의 디지털 자산 프로젝트 평가능력은 사기성 코인이 발붙일 수 없도록 하고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거래소는 중개하는 자산에 대한 심도 있는 리서치를 통해 위험을 포함한 다양한 내용에 대한 평가를 수행하고 이를 소비자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그래야 이러한 정보를 토대로 재무제표 같은 정보가 없는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꿈을 이루기 위한 투자를 진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루나 사태를 계기로 거래소의 본질이 무엇인지 사업의 철학을 재정립하길 바란다. 또 고도의 기술 및 사업평가 능력, 위험분석 및 관리 능력과 소비자 친화적인 기업풍토를 만들어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고 블록체인 및 디지털 자산 산업 발전에 앞장서 국민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 거래소들로 거듭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