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스타워즈’ 광선검으로 ‘올드보이’(2003) 장도리 액션을 오마주한 장면이 나올 뻔했다. 지난 8일 디즈니+가 독점 출시한 드라마 ‘오비완 케노비’(감독 데보라 초우) 에서 한국인으로는 처음 할리우드 SF 대명사 ‘스타워즈’ 시리즈 촬영감독을 맡은 정정훈(52) 촬영감독의 얘기다.
매주 한편씩 공개되는 총 6부작 중 3부 공개(15일) 전날 화상 인터뷰로 만난 그는 “여기선 ‘올드보이’가 워낙 전설적이어서 제가 참여하는 모든 영화현장마다 ‘올드보이’를 오마주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서 “‘오비완 케노비’를 촬영할 때도 (최민식이 장도리를 휘두르는) 복도 액션신을 오마주할 수 있느냐기에 복도(촬영 세트) 하나를 다 뜯어주면 하겠다고 했더니 하루가 더 걸린대서 농담처럼 넘어간 적도 있다. ‘올드보이’ 분위기를 많이 참고해서 다른 ‘스타워즈’ 작품보다 다크(dark)하다”고 말했다.
'스타워즈' 세계관 45년 사상 첫 한국 스태프 #'올드보이' 박찬욱 사단…할리우드 진출 9년만에 #美매체 "세계 최고 현역 촬영감독 중 한명"
'올드보이'부터 박찬욱과 7편, '스토커'로 美 진출
‘올드보이’부터 ‘아가씨’(2016)까지 박찬욱 감독과 7편을 함께하며 한국 대표 촬영감독으로 꼽혀온 그다. 박 감독과 할리우드 동반 진출한 영화 ‘스토커’(2013) 이후 미국 현지에서 활동해왔다. 스티븐 킹 원작 공포영화 ‘그것’(2017), 조디 포스터 주연의 범죄 스릴러 ‘호텔 아르테미스’(2018), ‘스파이더맨’ 톰 홀랜드 주연의 액션 모험극 ‘언차티드’ 등 참여 작품 규모도 커졌다. B급 공포 대가 에드거 라이트 감독과 함께한 ‘라스트 나잇 인 소호’(2021) 개봉 당시 인디와이어‧루퍼 등 외신들이 “전 세계 최고 현역 촬영감독 중 한명”이라 호평하기도 했다.
한국인이 ‘스타워즈’ 작품 주요 스태프(key staff)로 참여한 것은 이 시리즈 45년 역사상 처음이다. “최초”란 수식어에 “부담스럽다”고 밝힌 정 촬영감독은 “처음 ‘스토커’를 찍고 할리우드에 넘어왔을 때는 한국인 스태프여서 특이하게 찍을 거라 생각해서 저를 썼다면 지금은 그런 베네핏(benefit·특혜)은 싹 사라졌다. 여기 있는 다른 촬영감독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경쟁시킨다. 살아남기 힘들어졌다 싶기도 하지만(웃음) 정정훈이란 이름으로 경쟁하게 돼 잘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기존 '스타워즈' 룰 신경 쓰지 않고 독립된 영화처럼 찍었죠"
‘오비완 케노비’는 기존 ‘스타워즈’ 스타일을 새롭게 변주한 작품. ‘스타워즈’ 세계관 드라마 중 가장 호평받는 ‘만달로리안’(2019)의 에피소드 2개를 연출한 데보라 초우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배우 이완 맥그리거가 23년 전 시리즈 4번째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1-보이지 않는 위험’(1999)에서 처음 맡은 동명의 은하 평화유지군 제다이 전사 역할로 복귀한 작품이다. 악당 다스 베이더의 탄생에 뜻밖에 얽히게 된 오비완 케노비의 방황과 재기를 그렸다. 정 촬영감독은 “제가 오비완 캐릭터의 장점을 잘 살릴 수 있을 거란 생각에 ‘오비완 케노비’ 촬영을 맡긴 것”이라며 “시리즈에서 이어져 온 캐릭터와 배경의 느낌을 고증하면서도 알게 모르게 ‘스타워즈’는 이래야 해, 하는 룰(rule)을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찍었다”고 설명했다.
가령 기존 ‘스타워즈’는 컴퓨터그래픽(CG)으로 그린 우주 배경, 외계인, 전투 등 볼거리를 밝고 선명한 화면에 담았다면 ‘오비완 케노비’는 짙은 암흑, 황무지의 모래바람 속에 오비완의 존재감이 서서히 드러나는 장면이 많다. 정 촬영감독은 “기존 ‘스타워즈’ 시리즈는 CG가 많지만 이번엔 되도록 카메라 안에 모든 것이 담기게 하는 게 목표였다. 미리 디지털로 만든 배경과 현장의 촬영 세트, 조명 색감의 삼박자가 맞아야 하는 도전이었고 그에 따라 사실적으로 보이냐, 안 보이냐가 결정됐다”면서 “배경보다 인물에 더 집중해 그냥 한편의 독립된 영화라고 생각하고 찍었다. 기존 시리즈에 없던 와이드로우 앵글, 와이드하이 앵글도 그동안 제가 한국영화에서 썼던 방식을 눈치 안 보고 썼다”고 했다.
'신세계''부당거래'도 촬영, 감독들이 저를 찾는 이유는…
또 “오비완은 전 우주에서 가장 외로운 사람이라 생각하고 찍었다”면서 “말이 안 될 수도 있는데 최대한 어둡게 최대한 많이 보이는 데에 중점을 두고 촬영‧조명에 신경 썼다”고 했다. 이완 맥그리거와 호흡에 대해 “굉장히 똑똑하고 경험 많은 배우여서 본능적으로 카메라 상황에 잘 맞게 움직여줬다”고 즐겁게 돌이켰다.
박훈정 감독의 ‘신세계’(2013), 이준익 감독의 ‘구르믈버서난 달처럼’(2010),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2010) 등 굵직한 감독들의 스타일 강한 작품을 촬영해온 그다. 정작 스스로는 “스타일리시한 촬영감독이 아니”라며 “작품 속 인물에 대해 이해하려고 열심히 노력하는 점”을 감독들에게 선택받는 이유로 꼽았다. 항상 그를 “든든한 조력자”라 말하며 ‘그것’ 현장에 응원차 방문하기도 한 박찬욱 감독과도 ‘헤어질 결심’의 칸영화제 수상 전후로 연락을 나눴단다. “저랑 박 감독은 ‘헤어질 결심’은 아니고 가족처럼 잘 지내고 있다. 얼마 후면 작품 때문에 미국 오시니까”라며 차기작 가능성에도 여지를 남겼다.
"북한이냐, 남한이냐 묻던 미국 한국문화 하나의 장르 인정"
할리우드에서 K문화의 위상 변화도 체감한다는 그다. “처음 미국 왔을 땐 ‘노스 코리아(North Korea)야 사우스 코리아(South Korea)야’ 묻는 어이없는 경우도 많았는데 지금은 ‘‘오징어 게임' 봤어?’ ‘우리 딸이 BTS 콘서트 가고 싶어서 미치려고 해’라고 먼저 말을 건다. 한국문화가 특이한 게 아니라 하나의 보편화한 장르, 콘텐트로 인정받는다는 면에서 뿌듯하다”고 했다.
‘기생충’ 홍경표 촬영감독이 일본영화 ‘유랑의 달’에 참여하고, ‘오징어 게임’ ‘기생충’의 정재일 음악감독이 세계적 음악 레이블과 글로벌 계약맺는 등 최근 한국 스태프들이 잇따라 해외에 진출하고 있다. 그에 대해 그는 자부심도 드러냈다. "여기서 일해보니까 한국에 뛰어난 스태프가 많다는 걸 새삼 느낍니다. 다시 한국영화를 하게 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두려울 정도로요.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 한국 스태프들이 너무 자랑스럽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