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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물때 맞춰 1.6㎞ 헤엄쳤다…거제 뒤집은 신종 밀입국 [사건추적]

중앙일보

입력

지난 9일 경남 거제 해상에 정박해 있던 원양어선에서 밀입국을 시도한 외국인 선원 7명은 1.6㎞를 헤엄쳐 육지에 닿은 것으로 확인됐다. 현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로 국내 항구에 발이 묶인 원양어선의 외국인선원이 100명이 넘는 것으로 파악돼 출입국 당국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지난 9일 경남 거제시 가조도 일대 해상에서 해경이 무단이탈자가 발생한 원양어선을 수색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9일 경남 거제시 가조도 일대 해상에서 해경이 무단이탈자가 발생한 원양어선을 수색하고 있다. 연합뉴스

2주 전 밀입국 모의…“물때 보고 탈출했다”

15일 부산출입국외국인청 이민특수조사대에 따르면 부산 선적 명태잡이 원양어선(5000t급) A호에서 밀입국을 시도한 인도네시아 선원들은 2주 전부터 계획을 세웠다. 구명조끼를 옷 안에 감춰 입고 해상에 있는 선박에서 1.6㎞가량 떨어진 육지까지 헤엄쳐 이동할 생각이었다. 밀입국 당시 여벌 옷과 신발, 여권, 돈 등이 물에 젖지 않게 비닐봉지에 챙긴 이들은 A호에서 지내는 수개월 동안 밀물 때까지 파악한 것으로 조사됐다.

결국 이들은 물때를 보고 배에서 빠져나왔지만 7명 중 1명은 바다에 빠져 숨졌다. 무단이탈 신고를 받고 수색 중이던 해경은 이날 오전 8시57분쯤 거제시 사등면 성포리 해안에서 30대 인도네시아 선원의 시신을 발견했다. 해경은 별도의 외상이 없고 물을 많이 마신 것으로 봐 익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를 몰랐던 나머지 6명은 시신이 발견된 곳에서 약 800m 떨어진 성포항 인근에서 숨진 1명을 1시간가량 기다리기도 했다. 결국 6명만 택시를 타고 부산으로 달아난 이들의 밀입국 시도는 반나절 만에 끝이 났다. 이민특수조사대는 해경과 육경과 함께 수색에 나섰고, 사건 당일 밀입국한 6명과 이들의 밀입국을 도운 인도네시아 국적의 조력자를 부산시 서구의 한 모텔에서 검거했다.

지난 9일 경남 거제시 가조도 동쪽 1.6㎞ 해상에 닻을 내리고 있던 원양어선(5000t급). 연합뉴스

지난 9일 경남 거제시 가조도 동쪽 1.6㎞ 해상에 닻을 내리고 있던 원양어선(5000t급). 연합뉴스

“러시아 조업 못해…돈 못 벌고 귀국?” 밀입국

조사 결과 이들은 A호에서 근무하기 위해 지난 3월 선원 근무용 비자(C-3)를 받고 입국했다. A호는 5월 러시아 해역으로 출항해 다음 해 1월쯤 우리나라로 돌아올 계획이었지만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로 조업 시기가 계속 미뤄졌다. 지난 4월 19일부터 거제 해상에서 닻을 내리고 있던 A호에는 외국인 45명, 한국인 12명 등 57명의 선원이 타고 있었다.

출입국 당국은 이들은 돈을 제대로 벌지 못하고 귀국할 것이란 불안감에 밀입국을 시도 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이민특수조사대 관계자는 “외국인 선원들은 기본급 600~800달러만 받았다고 한다”며 “수당 등을 받으려면 조업을 나가야 하는데, 러시아 사태로 일을 못 하자 돈을 제대로 못 벌고 집에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이 선원들 사이에서 나왔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민특수조사대는 인도네시아 선원 6명과 이들의 도주를 도운 조력자를 출입국관리법 위반 혐의로 이번 주 검찰에 송치할 계획이다. 선원들은 정상적인 입국 절차를 거치지 않고 국내로 밀입국하려 한 혐의다. 조력자는 선원들의 택시비와 모텔비를 내주는 등 은닉·도피를 도운 혐의를 받고 있다.

지난 9일 경남 거제시 가조도 일대 해상에서 해경이 무단이탈자가 발생한 원양어선을 수색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9일 경남 거제시 가조도 일대 해상에서 해경이 무단이탈자가 발생한 원양어선을 수색하고 있다. 연합뉴스

러 조업 막힌 원양어선 더 있어 ‘발동동’

출입국 당국에 따르면 감천항 주변에는 명태와 대구를 잡는 국내 선적 원양어선(2000~3000t급) 여러 척이 정박해 있다. 이들 원양어선은 A호와 마찬가지로 러시아 해역에서 조업을 할 예정이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명태·대구 조업 시기인 5~6월에 맞춰 러시아 해역으로 출항했어야 하지만 항구에 발이 묶여 있다. 러시아 정부로부터 원양 조업 허가는 받았지만,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에 따른 대러 제재로 계좌가 막혀 입어료를 송금하지 못해서다. 입어료는 다른 나라의 어업 수역 안에 들어가서 조업할 때 내야 하는 요금이다.

서울 노량진수산물도매시장에서 판매된 러시아산 냉동 명태. 연합뉴스

서울 노량진수산물도매시장에서 판매된 러시아산 냉동 명태. 연합뉴스

100명 넘는 외국인…수개월째 선박 생활

이처럼 러시아 원양 조업 시기가 미뤄지면서 부산·경남에 발이 묶인 외국인 선원이 100명이 넘는 것으로 파악됐다. 한국원양산업협회에 따르면 감천항과 거제 해상에 정박하며 러시아 조업을 기다리는 원양어선에는 14일 현재 한국인 54명, 외국인 117명 등 총 171명의 선원이 승선해 있다. 이들 외국인 선원 중에는 수개월째 선박에서 지내고 있는 이들이 상당수다.

원양어선 선사와 계약한 한 인력업체 관계자는 “지난 3월경부터 선박 수리 업무를 맡은 외국인 선원들이 들어와 배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모두 조업이 재개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원양산업협회 관계자는 “조업이 계속 지연되면 선사들 피해가 커지는 만큼 6~7월 중에 조업을 할 수 있도록 정부가 러시아와 협상 중에 있다”고 말했다.

당국 “24시간 감시원 배치 요청”

해양수산부는 명태·대구 국적선 원양 조업과 관련해 러시아 정부와 협상을 진행 중이다. 부산출입국·외국인청은 밀입국 사건이 발생한 A호와 유사한 원양어선을 소유한 선사에 ‘외국인 선원 무단이탈’을 사전에 방지해달라고 요청한 상태다. 부산출입국·외국인청 관계자는 “이번 사건과 유사한 상황에 있는 선박에 대해 24시간 주야 교대 감시원 배치 등을 선사에 요청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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