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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상언의 시시각각

처음엔 다 “좋은 뜻에서”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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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20년 전인 2002년 6월, 살짝 더워지기 시작한 딱 요맘때였다. 전날 밤 안정환 선수의 역전골로 한국이 이탈리아를 이기고 월드컵 8강에 올라 온 국민이 축구 얘기만 하던 19일, 김대중 대통령의 차남 김홍업씨가 대검 중앙수사부(중수부)에 출석했다. 그는 준결승 진출 티켓이 걸려 있는 스페인과의 경기를 하루 남겨놓은 21일 구속됐다. 현직 대통령 아들의 구치소행을 전하는 뉴스가 월드컵 열기에 절반 이상 파묻혔다. 언제 또 올지 모르는 역사적 축제를 온전히 즐길 수 없었던, 나를 포함한 당시 대검 담당 기자들은 청와대와 검찰의 절묘한 택일에 감탄하면서 조용히 불만을 달래야 했다.

대통령 차남의 혐의는 여러 기업의 이권에 관여하고 금품을 받았다는 알선수재였는데, 대부분 그가 직접 받은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최근에 작고한 재벌가 3세 대기업 경영자는 김홍업씨 대학 1년 후배인 전직 권투선수 이모씨에게 정성을 쏟았다. 여러 차례 돈을 줬다. 중수부가 확인한 것은 총 17억원이다. 횡령 등의 혐의로 검찰 수사 대상이 된 그 3세 경영인은 이씨 주선으로 김홍업씨를 만났다. 그는 자신에 대한 검찰 수사와 금융당국의 조사가 무리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호소했다. 김홍업씨는 비서 역할을 한 절친 김모씨에게 억울한 사정이 있는지 알아보면 좋겠다고 했고, 그 친구는 얼마 뒤에 친분이 있는 권력 실세에게 전화를 걸었다.

권력자 측근 비리의 단초는 인연
선의로 포장된 민원이 파국 초래
호가호위 감시 시스템 서둘러야

김홍업씨 입장에서는 ‘민원 청취’였다. 드러난 죄를 덮어주라고 누군가에게 지시하거나 청탁한 것도 아니었다. 이 일에 개입한 후배와 친구가 거액의 금품을 챙겼다는 사실은 몰랐다고 했다. 수익 계산도 애매하다. 이씨가 낸 룸살롱 술값 등의 유흥비로 김홍업씨도 이득을 봤다는 게 중수부의 판단이었다. “정이 많고 마음 여린 사람.” 당시 여권이 대통령 아들을 엄호하며 한 말이다.

최서원으로 개명한 최순실씨에 대한 특검과 검찰 수사에서는 중소기업 K사가 주목을 받았다. 이 회사가 만드는 원동기용 흡착제가 현대자동차에 납품된 게 문제였다. 정유라씨 친구의 부모가 이 회사 주인이었는데, 최씨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외국산 물품을 대체할 수 있는 국산품이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고, 안종범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을 통해 현대차 고위층에게까지 ‘민원 전달’이 이뤄졌다. 최씨가 그 대가로 샤넬 핸드백과 현금 수천만원을 받았다는 게 수사에서 드러났다.

박 전 대통령 기소에 이 부분도 포함됐다. 현대차 측은 K사 제품으로 비용 절감 효과를 봤다고 증언했다. 최씨가 가방과 돈을 받았다는 것을 박 전 대통령이 알 수는 없었다. 대통령이 직접 얻은 이득이 없기도 하다. 변호인은 “좋은 뜻에서 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법원은 대통령의 직권남용죄를 인정했다. 청와대 비서관을 동원해 기업 납품에 개입한 불법 행위로 판단했다.

권력의 흐름을 좇는 사람은 무수히 많다. 통치자의 가족과 친구는 그들에게 귀인이다. 이미 인연이 있다면 더욱 쌓으려 노력하고, 없다면 만들 방법을 궁리한다. 그 관계가 권력이 된다. 꼭 뭔가를 바라서 다가서는 게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살다 보면 불편한 일이 생기고, 때론 선의로 나서서 돕고 싶은 일도 마주한다. 욕심도 발동한다. 결국 동티가 난다. 이 불행의 과정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 윤석열 대통령을 포함한 전직 특수통 검사들이다.

대통령과의 인연을 은근히 영업 무기로 삼는 변호사들이 이미 등장했다. 대통령 부인 팬클럽 회장은 회비를 거두는 별도의 조직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새 정권 출범이 갓 한 달 지났는데 벌써 호가호위(狐假虎威) 조짐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이를 막을 민정수석실은 사라졌다. 대통령 주변 사람을 감시할 특별감찰관 임명도 기약이 없다. 오늘도 어디에선가 ‘좋은 뜻에서’의 친분이 이어지고 두터워질 터이다. 여러 번 놀라게 한 ‘자라’ 때문에 ‘솥뚜껑’에 긴장하는 것이면 차라리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