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양정무의 그림세상

섬소년 김환기, 산소년 유영국

중앙일보

입력 2022.06.16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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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한국 현대미술의 양대 축이 섬소년과 산소년으로 나뉘는 듯하다. 여기서 섬소년은 김환기, 산소년은 유영국이다. 김환기는 ‘지도에도 없는 조그마한 섬’ 전남 신안 안좌도 출신이다. 첩첩산중 경북 울진이 고향인 유영국은 “늘 바다와 산을 가까이에서 보고 즐길 수 있었던 환경 때문에 산을 그린다”고 했다.

오늘날에도 쉽게 가기 어려운 오지 중의 오지에서 태어난 두 화가가 한국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거장으로 우뚝 섰으니 놀라운 일이다. 특히 그들의 업적은 지난 세기 가장 도전적인 미술이라고 할 수 있는 추상미술에서 거둔 성과이기에 한층 더 인상적이다.

한국 추상미술의 두 거장
엄격하고도 따듯한 화면
한국 현대사 무게도 담아
‘마법 같은 미술’의 매혹

김환기의 ‘무제 20-III-71’, 1971, 55.5x41㎝. 김환기는 1960년대 화면을 점으로 가득 채운다. [사진 환기미술관]

김환기의 ‘무제 20-III-71’, 1971, 55.5x41㎝. 김환기는 1960년대 화면을 점으로 가득 채운다. [사진 환기미술관]

흥미롭게도 두 작가는 성장 배경뿐만 아니라 나이와 작가로서 전개 과정까지 비슷하다. 김환기는 1913년생, 유영국은 1916년생으로 모두 한국 현대화가 1세대에 속한다. 향학열이 강한 부농 집안에 태어난 덕분에 일본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는 점도 같다. 유학 시절 서구 순수추상 미술에 흥미를 느끼면서 두 화가는 서로 친한 동료 화가가 됐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1947년 신사실파라는 단체를 결성하며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두 작가는 순수 추상의 길로 접어드는 계기까지도 공유한다. 그들은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로 1963년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참가하는데, 이를 기점으로 두 작가의 작품세계는 크게 변모한다. 비엔날레 이후 김환기는 뉴욕에 체류하면서 캔버스 화면 전체를 점으로 채우는 전면점화의 세계로 나간다. 유영국도 전업작가의 길을 선언하고 자연의 형식을 엄격한 색만 구성으로 구축하는 회화세계를 완성한다.

유영국의 ‘Work’, 1969, 136x136㎝. 유영국은 1960년대를 기점으로 순수추상으로 나아간다. [사진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유영국의 ‘Work’, 1969, 136x136㎝. 유영국은 1960년대를 기점으로 순수추상으로 나아간다. [사진 유영국미술문화재단]

그들이 최종적으로 도달한 조형 세계는 엄격하다. 하지만 그림 속에는 태생적 감수성이 촘촘히 배어 있다. 김환기의 점은 섬 하늘 위에 떠 있는 맑은 별이고, 석양 녘 낙조이고, 섬 속 들판이 된다. 유영국의 직선과 곡선은 산봉우리와 계곡, 골짜기로 한없이 변조된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이들의 작품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한국에서도 주변부라 할 수 있는 곳에서 성장한 화가들이 모두 반백의 나이에 현대 추상미술의 정점에 도달하면서 여기에 자신의 정체성까지 녹여냈다는 사실에 경외감을 갖게 된다. 시작은 늦었지만 최종적으로는 세계미술사의 시간표와 동시대적으로 맞춰나갔고, 그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까지 담아낸 것이다.

사실 출생연대만 놓고 보면 김환기와 유영국 두 화가는 1912년생 잭슨 폴록과 1915년 로버트 머더웰과 같은 미국 추상표현주의 작가와 동년배라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들의 작품세계가 보여주는 미학은 20세기 미국의 색면추상을 대표하는 케네스 놀랜드(1924~2010)와 프랭크 스텔라(1936~)의 작품과 나란히 할 때 더욱 두드러지는 것 같다. 이때 느껴지는 그들의 무게감 있는 색조와 형태는 서구 작가의 고조된 색면분할과 대조를 이루며 결과적으로 한국 근현대사의 역사적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케네스 놀랜드의 ‘Every Third’, 1964, 1733x177㎝. [사진 크리스티]

케네스 놀랜드의 ‘Every Third’, 1964, 1733x177㎝. [사진 크리스티]

마침 두 추상화가의 작품 세계를 동시에 감상할 수 있는 전시가 서울 삼청동에서 열리고 있다. 유영국 작고 20주년 기념전이 국제갤러리에서 진행되고 있고, 여기서 멀지 않은 현대화랑에선 김환기의 뉴욕 시절(1963~1974) 작품이 그와 뉴욕에서 함께했던 후배 작가들의 작품과 나란히 전시되고 있다.

이 전시들을 관람하면서 두 작가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작가의 예술적 성취에 대한 문명사적 의의를 짚어야 할 시점이 무르익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간 한국 현대미술에 대한 미술사적 연구는 소위 ‘한국적 추상’을 찾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20세기 한국 미술은 서양 실험미술을 뒤쫓는 모방적 노력으로 보면서 그 속에서 한국적 목소리를 찾아내려 했다고 볼 수 있다.

돌이켜보면 분명 한국 현대미술이 서양미술을 배워 나가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김환기나 유영국의 1960년대 미술을 보고 나면 이 시기부터 한국의 미술작가도 현대인의 위기를 조형적으로 고민하면서 그것을 추상적 언어로 응축시켜내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느낄 수 있다.

지금 전시가 보여주듯 김환기와 유영국, 그리고 동시대 한국 작가들이 이룬 미술사적 성과는 마법같이 탁월하기에 머지않은 미래에 세계 미술사 책에 한국 현대미술 작품들이 속속 실릴 날이 올 것으로 믿는다.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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