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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석 前의장 "가슴에 '忍자' 100개라도 새기며 대화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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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석 전 국회의장은 “국회의장은 당이 아닌 국민과 국익이라는 등대만을 바라보며, 가슴에 참을 인(忍)자를 100개쯤 새기며 끊임없이 소통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병석 전 국회의장이 1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박병석 전 국회의장이 1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15일 국회 의원회관 사무실에서 만난 박 전 의장은 90여분에 걸친 중앙일보와의 인터뷰 내내 소통과 공감, 대화와 타협을 여러차례 강조했다. 그러면서 사무실 한켠에 놓인 원형 테이블을 가리키며 “의장실에서 이뤄졌던 공식 원내대표 회동만 기억하겠지만, 사실 중요한 협의는 다 이방 저 작은 책상에서 이뤄졌다”고 했다.

의장 재임 시절 공식적으로 52회의 여야 원내대표 회동이 열렸다. 의장이 나선 중재가 특히 많았다. 
“협상의 출발은 신뢰이고, 신뢰는 잦은 대화와 열린 마음에서 시작된다. 사실 50여회의 공식 회동 말고 비공식 만남은 100회가 넘는다. 비공식 회동은 눈에 띄지 않게 804호 이방에서 진행했다. 중재 과정도 노출해 본 적이 없다. 내가 곤란한 일을 겪더라도 굳이 해명하거나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야당도 ‘박병석과는 어떤 얘기를 해도 믿을 수 있다’는 신뢰를 줬던 것 같다.”
두번의 예산안이 기한 내에 처리됐고, 5번의 추경안도 합의 처리됐다.
“예산은 여야가 아닌 국민의 것이다. 충분한 대화로 신뢰를 쌓고, 신뢰를 바탕으로 솔직한 말을 나누며 타협점을 찾았다. 타협이 안되면 적극적으로 중재안을 내고, ‘양당의 말이 맞는지, 의장의 중재안이 맞는지 심판을 받겠다’고도 했다. 특히 권성동 국민의힘 원내대표 등 솔직담백한 분을 잘 만났다고 생각한다.”
지난달 29일 박병석 당시 국회의장과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대표, 더불어민주당 박홍근 원내대표,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국회의장실에서 추경안 논의를 위한 회동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29일 박병석 당시 국회의장과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대표, 더불어민주당 박홍근 원내대표,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국회의장실에서 추경안 논의를 위한 회동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언론중재법, 검수완박법 처리 과정에서 민주당으로부터도 불만이 나오기도 했다.
“검찰개혁법은 ‘누구도 칭찬듣지 못할 결론이 날 것’이란 말을 꺼내며 시작했다. 실제 여야 열성 지지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욕설 문자 등으로 휴대전화를 7일간 못 가지고 다닐 정도였다. 그분들의 강렬한 뜻도 민심이지만, 의장은 침묵하는 다수를 보고 가야 한다. 다수의 의견을 잃어버리는 순간 공정성, 중립성, 중재력은 사라지게 된다. 여야 모두 섭섭했을 거다. 그랬기 때문에 퇴임사를 하고 의장직에서 내려올 때 여야 의원들에게 기립박수를 받으며 평가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16일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하기 전 박병석 의장과 인사를 하고있다. 김성룡 기자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16일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하기 전 박병석 의장과 인사를 하고있다. 김성룡 기자

입법ㆍ사법ㆍ행정의 3권(三權)이 분리된 대한민국에서 국회의장은 대통령에 이은 국가 의전서열 2위 자리다. 입법부의 수장으로 임기 중엔 당적을 가질 수 없다. 국회 운영의 중립성을 위해서다.

그러나 김진표 의원이 선출된 민주당 내 국회의장 후보 경선 과정에서 후보들은 모두 “민주당 출신임을 잊지 않겠다”며 사실상 국회의 ‘편파 운영’을 예고했다. 이에 대한 입장을 묻자, 박 전 의장은 즉답 대신 ‘긴 한숨’으로 답했다.

국회에 대한 국민의 불신이 크다. 의장 경선에서도 ‘선명성 경쟁’이 벌어졌다.
“국회의장은 전체 국민을 대변하는 300명 국회의원들의 의장이다. 결코 한 당의 대변인이 돼선 안 된다. 본인이 소속됐던 당의 역사에 기록될지, 대한민국 국회와 헌정사에 기록될 지를 판단해야 한다. 취임사에서 군주민수(君舟民水)라는 말을 했다. 국민이라는 강물은 정치라는 배를 띄우기도 하지만,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
법사위 등을 놓고 후반기 원구성도 못했고, 차기 의장도 취임하지 못한 입법공백 상태다.
“검찰개혁법(검수완박법) 처리 과정에서 신뢰정치가 사라졌다. 만약 국민의힘이 합의를 뒤집지 않았다면 민주당도 법사위원장을 고집하지 않았을 거다. 법사위에도 잘못이 있다. 20대 국회에서 법사위 한두명 의원이 여야 합의안을 통과시지키 않았다. 이런 법안이 91건에 달했다. 이런 횡포가 어디있는가. 법사위는 체계 및 자구수정에만 충실하면 된다. 아무 근거 없이 상원 역할을 하는 잘못된 행태와 제도를 고쳐야 한다.”  
신뢰를 회복할 방법이 뭐라고 생각하나.
“의장에 취임하면서 국민의힘엔 ‘의석이 180대 100이라는 점을 명심하라’고 했고, 민주당엔 ‘득표율차는 7%포인트밖에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억강부약(抑强扶弱)을 내세워 국회를 운영했다. 강한 민주당을 누르고 약한 국민의힘을 도와야 한다는 뜻이다. 궁극적으로는 국회 스스로 견제할 수 있는 상하 양원제로 가야한다고 생각한다. 현재 정원 300명 중 50명정도로 상원을 구성하면, 의회의 자율적 통제 장치를 마련할 수 있다.”
4월 22일 박병석 당시 국회의장(가운데)과 더불어민주당 박홍근(왼쪽),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대표가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 관련 국회의장 중재안에 합의한 후 합의문을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뉴스1

4월 22일 박병석 당시 국회의장(가운데)과 더불어민주당 박홍근(왼쪽),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대표가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 관련 국회의장 중재안에 합의한 후 합의문을 들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뉴스1

검수완박 법안에 대한 소회가 있을 것 같다.
“원내대표의 합의와 양당 의원총회 추인을 거쳐 국회의장이 최초로 사인하고서 국민에게 공개 천명한 완전한 합의안이다. 국민투표를 제외하고 정치가 할 수 있는 최고수준의 합의였다. 그런데도 국민의힘이 이를 번복한 건 의회정치의 부정이다. 의회정치의 파괴를 막기 위해 합의안대로 갈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자세히 말하지 않겠지만, 당시 합의가 뒤집힌 과정에서 당시 야당이 아닌 ‘다른 곳’의 요청이 있었을 거다. 결과적으로 의회정치의 큰 흠으로 남게 됐다.”
시행령을 제한하는 내용의 국회법 개정안도 쟁점이 되고 있다.
“현 여당은 여소야대 정국에서 법으로 통과시키지 못하는 것을 시행령으로 우회하려고 하고 있다. 법무부에 인사검증단을 설치한 것이 대표적이다. 법은 정도를 가는 게 옳다. 이렇게 형식적 법치주의라는 이름 아래 법기술적 편법 우회로를 만드는 것은 법치주의 정신에 어긋난다.”

박 전 의장은 선거 연패 이후 8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벌어지는 민주당 내 계파전에 대해 “당을 완전히 허물고 새로 짓는 재창당 수준의 변화가 필요하다”며 “적당히 비판하고, 적당한 대안을 세웠다가는 국민의 신임을 회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민주당은 전통과 역사가 있는 당이기에 반드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고 했다.

박병석 전 국회의장이 1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박병석 전 국회의장이 1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민주당이 대선과 지방선거에서 연패했다.
“새로운 여당에 힘을 실어주자는 여론이 있었고, 민주당에도 공천 문제와 부동산 문제 등 다양한 패배의 이유가 있다. 큰 틀에서 보면 지방선거를 ‘대선의 후반전’이 아닌 철저한 지역일꾼론으로 갔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민주당은 선거 패배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필요하다. 반드시 외부인에게 맡겨 객관적 평가를 해야 한다.”
여야 모두 ‘팬덤정치’로 인한 폐해가 심각하다는 지적이 있다.
“팬덤이라는 열성 지지자는 정치인에게 큰 자산이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정말 침묵하는 다수의 목소리가 포함돼 있는지 판단을 잘해야 한다. 목소리가 과다대표된 것인지 냉철하게 판단해야 한다. 팬덤정치로 인한 혐오와 적대 정치, 편가르기와 갈라치기 정치가 일상화돼 버렸다. 이것은 반드시 청산해야 할 과제다.”
박병석 전 국회의장이 1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박병석 전 국회의장이 15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박 전 의장은 ‘어떤 의장으로 기록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세종 국회시대를 확립하고, 대화와 타협의 의회정치를 진전시킨 의장으로 기록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는 “국회에 이어 대통령실 제2집무실은 물론 관련 기관과 기업이 안 올 수 없다”며 “민의의 대변 기관인 국회가 세종으로 가는 것은 균형발전의 지름길”이라고 말했다. 이밖에 67명의 외국 국회의장과 23명의 국가원수를 만나며 의회 외교를 활성화시킨 점, 미ㆍ중 패권 경쟁 중 정부를 대표해 베이징 올림픽에 참석한 실사구시 대중 외교 등도 대표적 성과로 꼽고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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