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버보다 2년 빠른 '콜버스' 접게한 이 규제…6년째 못 뽑았다 [규제 STOP]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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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수 국무총리가 지난달 24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규제혁신장관회의를 주재하며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한덕수 국무총리가 지난달 24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규제혁신장관회의를 주재하며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윤석열 정부가 규제 개혁의 칼을 뽑았다. 14일 대통령 주재로 중요 규제혁신 사안을 결정하는 ‘규제혁신전략회의’를 신설하겠다고 밝히면서다.

시행령 개정으로 고칠 수 있는 규제 뽑아보니 #

재계는 어느 때보다 기대감이 높다. 윤석열 대통령은 주요 대기업이 지난달 향후 5년간 1000조원대 투자, 30만 명대 고용 계획을 밝힌 사실을 언급하며 “이제 정부가 투자를 가로막는 규제를 풀어 화답할 때”라고 규제 개혁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재계는 곳곳에 ‘지뢰’처럼 박혀 있는 규제를 제거하는 건 어려운 과제라는 분석이다. 으레 상식처럼 보이는 일도 현실에선 걸림돌투성이여서다.

가령 ‘실력 있는 현역 기업인’을 사외이사로 선임하는 것도 난관이 많다. 대기업 A사는 최근 감각이 뛰어난 벤처기업인을 사외이사로 영입하려다 포기했다. 공정거래법 시행령에 따라 사외이사는 ‘동일인 관련자 범위’에 포함돼 선임과 동시에 그가 지배하는 회사가 해당 기업집단에 자동 편입된다.

이렇게 되면 사외이사가 경영하는 회사는 각종 신고 의무가 생기고, 중소기업 혜택은 사라진다. 자신의 친족과 가계도, 주식보유 현황, 자금 거래내역을 공정위에 제출하고 관리·감독을 받아야 한다. 유정주 전국경제인연합회 기업정책팀장은 “사외이사는 독립성을 보장받는데 이런 규제 때문에 전문성·다양성을 갖춘 인재 확보가 어렵다”고 말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신기술이나 신산업 육성도 깐깐한 시행령·규칙 앞에선 속수무책이다. 최근 세계적으로 떠오르는 친환경 사업은 시행령 한 줄 때문에 첫 삽도 못 뜨고 있다. 화학업체인 B사는 폐플라스틱 열분해유를 활용해 재활용 제품을 만드는 사업을 구상 중이다. 그러나 폐플라스틱 열분해유는 폐기물관리법 시행규칙상 정제연료유 인화점 규격(30℃ 이상)에 맞아야 상품화가 가능하다. 열분해유는 인화점이 10∼20℃로 이런 조건을 도저히 맞출 수 없다.

B사 측은 “이미 글로벌 경쟁사들은 열분해유 기술 제휴를 통해 사업에 뛰어들었다”며 “경쟁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국내에서도 열분해유 기술을 활용할 수 있도록 제품 규격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4차산업혁명의 꽃으로 불리는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분야는 한국에선 ‘국가전략기술’로 인정받지 못한다. 주요 경제강국들이 D·N·A(데이터·네트워크·AI) 기술에 올인하고 있는 분위기를 역행하는 것이다. 조세특례제한법 시행령에 국가전략기술은 반도체·2차전지·백신 등으로 한정하고 있어서다.

콜버스는 심야시간 등에 같은 방향으로 귀가하는 사람을 모아 13인승 밴으로 이동하는 일종의 제한적 카풀 서비스였다. 2015년 12월 등장했다. ‘차량 공유 서비스의 원조’ 우버보다 2년 빨랐다. 하루 평균 이용객 수가 400명을 넘었다. 하지만 승객을 뺏긴다고 생각한 서울시 택시사업자들이 반발했고, 정부는 규제를 푼다고 했다가 영업시간·차종 등을 제한하는 또 다른 규제를 만들었다.

우버보다 서비스가 빨랐던 차량공유 서비스 콜버스는 기존 사업자의 반발로 결국 사업을 접었다. [중앙포토]

우버보다 서비스가 빨랐던 차량공유 서비스 콜버스는 기존 사업자의 반발로 결국 사업을 접었다. [중앙포토]

결국 콜버스랩은 기존 사업을 포기했다. 박병종 콜버스랩 대표는 “6년이 지난 지금도 규제가 여전하다”며 “규제 개혁이 헛바퀴를 도는 건 이해 관계자들이 ‘미래’와 싸우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럴수록 국가 경쟁력을 갉아먹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소프트웨어업체인 C사는 자동차도 스마트폰처럼 전자제어장치를 쉽게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OTA(Over-The-Air) 기술’을 개발했지만 현행법에 가로 막혔다. 자동차관리법 시행규칙상 국내에서는 소프트웨어 문제가 발견되면 정비소에 차량을 입고해 유선으로 업데이트를 해야 해서다.

이에 C사는 2020년 6월 ‘규제샌드박스(한시적 규제 유예·면제)’ 허가를 승인받아 OTA 서비스를 출시했다. C사 관계자는 “OTA는 국내 모빌리티 업계 전반에 걸쳐 디지털화를 촉진하는 촉매제 역할을 할 것”이라며 자동차관리법 시행규칙 개정을 요청했다.

국내 대기업이 개발한 신제품을 정작 국내에선 살 수 없는 진풍경도 연출됐다. 지난해 7월 도쿄올림픽에 출전하는 태국 선수단 120여 명은 LG전자의 전자식 마스크를 착용했다. 이에 비해 김연경 등 한국 대표단은 일반 마스크를 썼다. 홍콩·대만·태국 등에서 전자 마스크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제품이지만 정작 한국엔 없었다. 일부 소비자들은 두 배 가까운 값을 치르고 해외 공동직구(직접구매)를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LG전자의 2세대 전자식 마스크인 ‘퓨리케어 웨어러블 공기청정기’. 코로나19가 극성이던 시절 국내 출시를 못해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평이다. [사진 LG전자]

LG전자의 2세대 전자식 마스크인 ‘퓨리케어 웨어러블 공기청정기’. 코로나19가 극성이던 시절 국내 출시를 못해 '골든타임'을 놓쳤다는 평이다. [사진 LG전자]

LG전자는 2020년 9월부터 전자식 마스크를 ‘의약외품’으로 허가 받기 위해 식품의약품안전처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5개월 동안 심사가 지연되자 지난해 2월 심사를 자진 철회했다. 그러는 동안 사회적 거리두기가 전면 해제되고 실외에선 마스크를 벗을 수 있게 됐다. LG전자로선 ‘골든타임’을 놓친 셈이다. 업계에선 LG전자가 의약외품 허가를 포기하고 공산품으로 국내에 출시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중소기업과 소상공인한테는 탁상행정이 사업을 확장하거나 창업하는데 있어 족쇄가 되기도 한다. 경기도 파주에서 정수기를 만드는 D사의 서모 대표는 “요새 속이 까맣게 타 들어갈 지경”이라고 말한다. 최근 일본에서 정수기 2만 대를 수주했지만 정작 절반 밖에 만들지 못하고 있어서다.

서 대표는 “올해 7억원을 들여 제조라인을 새로 들여놓았지만 일손이 부족하다”며 “청년들은 중소기업 오기를 꺼린다. 외국인 채용은 쿼터제에 막혀 있다”고 호소했다. 외국인 인력 쿼터 문제는 국무조정실장이 주재하는 외국인력정책위원회를 통해 확대가 가능하다. 그러나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내국인 일자리가 사라질 수도 있는 문제라 쉽게 결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는 “정부는 18년 전부터 이 같은 논리를 내세웠지만 내·외국인의 일자리는 냉정하게 구분돼 있는 게 현실”이라며 “고용 시장에서 낡은 규제 마인드를 풀 때가 됐다”고 말했다.

올해 4월 입국한 필리핀 '외국인 계절노동자'. [연합뉴스]

올해 4월 입국한 필리핀 '외국인 계절노동자'. [연합뉴스]

미용사 최모씨는 미용실 창업이 꿈이었다. 상가를 빌리고 시설을 갖추는 투자금을 고민하던 차에 하나의 미용실을 여러 원장이 같이 쓰는 ‘공유미용실’에 대해 들었다. E사는 2020년 6월 규제샌드박스를 통해 일시적으로 공유미용실을 운영, 최씨를 포함해 100여 명의 미용사가 창업을 했다. 최씨 등은 “공중위생관리법 시행령·시행규칙 개정을 통해 공유미용실을 법제화해야 한다. 더 많은 미용업자에게 창업의 길을 열어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대한상공회의소 관계자는 “결국은 공무원들이 할 수 있는데도 잘 안 하더라”며 “국회를 통해 법을 한 글자라도 바꿔야 책임이 분산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고 꼬집었다.

최준선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한국 법은 99%가 의원 입법”이라며 “공무원들이 공청회 등 여론을 듣는 절차를 거치는 게 귀찮으니 국회에 넘기는 경우가 많다”며 “이러면 현실 반영이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부 부처마다 고시·규칙·시행령을 재검토하는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며 “장관이 개선안을 발표하고 대통령이 평가하는 보고대회 등을 하면 규제 개혁 속도가 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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