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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베이비박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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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경희 기자 중앙일보 P디렉터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배우 송강호에게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안겨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브로커’는 베이비박스를 둘러싼 이야기다. 베이비박스는 키울 형편이 안 되는 아기를 안전하게 두고 가는 작은 상자다. 중세 이탈리아에선 신생아를 강물에 버리는 일이 잦았다. 영아 살해를 막기 위해 1198년 ‘버린 아기 회전판’을 교회 벽에 설치한 것을 시작으로 유럽 전역에 퍼져 19세기까지 광범위하게 쓰였다. 그것이 현대적 형태로 다시 나타난 게 베이비박스다.

 한국에선 2009년 서울 주사랑공동체교회 담벼락에 최초로 설치됐다. 그러나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있고, 영아유기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국가의 환영을 받진 못했다. 베이비박스에 두고 간 엄마가 아동복지법 위반(영아유기)으로 처벌받은 판례도 있다. 통상 징역 4~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다. 주사랑공동체 양승원 사무국장은 "2017년 아동복지법이 강화되면서 아이를 되찾으러 온 친모를 경찰이 인지하면 기소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처벌을 피하려면 영영 아이를 안 찾아야 하는 셈이다.

 국내 입양을 활성화하기 위해 2012년 개정된 입양특례법 역시 난관이다. 친생부모가 실명으로 출생신고를 하고 양육 포기에 동의한 뒤 가정법원의 허가를 받아야 아이를 입양 보낼 수 있어서다. 아기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법 개정이었지만, 베이비박스에 놓인 아기의 수는 오히려 늘었다. 우리 법에서 혼외자 출생신고는 친모 몫이다. 무사히 입양되면 친모의 가족관계등록부 등에서 아이의 기록이 삭제된다. 하지만 혹여 파양되면 민법에 따라 입양 전 친족 관계가 부활한다.

 주사랑공동체 측은 베이비박스에 놓인 아기는 ‘버려진 아이’가 아니라 ‘지켜진 아이’라고 강변한다. 생명을 죽이지 않으려는 엄마들의 마지막 선택지라서다. 베이비박스를 찾은 친모 중 15~16%는 교회의 지원을 받아 손수 아이를 키운다. 반면 나라에선 출생신고 없이는 출산장려금은커녕 분유 한 통 지원받기 힘들다. 형편이 안 돼 아이를 남의 손으로라도 잘 기르려는 엄마를 우리의 법은 처벌 대상으로만 보는 듯하다. 어떤 형편에 놓인 엄마여도 출산을 환영하고 지지해주는 사회가 되길 바란다. 영화 ‘브로커’에서처럼, 모든 생명에게 “태어나줘서 고마워”라 말해줄 수 있도록.

영화 '브로커'의 한 장면. [사진 CJ ENM]

영화 '브로커'의 한 장면. [사진 CJ EN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