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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박지원 전 국정원장, 부적절한 언행 멈추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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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원장 시절 안 정보, 흥밋거리인 양 누설  

존재 확인된 국정원 존안자료 폐기해야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의 가벼운 언행이 연일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해 주요 정치인·기업인·언론인의 존안 자료인 이른바 ‘X파일’이 국정원 메인 서버에 남아 있다”고 공개한 그는 국정원이 “부적절한 행동”이라고 항의하자 “유의하겠다”며 사과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굉장히 어려워질 것이다. 곧 제거될 수 있다”고 방송에서 밝히며 국정원장 재직 중 취득한 정보 흘리기를 이어갔다.

박 전 원장의 발언은 대한민국 최고 정보기관의 수장을 지낸 사람으로서 기본을 망각한 것이다. 국정원법에 따르면 재직 중은 물론 퇴직 이후에도 직무상 안 비밀을 누설하는 직원은 10년 이하 징역이나 1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해진다. 법을 따질 것도 없이 재직 중 안 기밀을 지키는 건 정보기관 종사자라면 누구나 지키는 철칙 아닌가. 한 달 전까지 국정원 수장을 지낸 사람이 평직원도 엄수하는 철칙을 거리낌 없이 어기며 언론 플레이를 하고 있으니 경악을 금할 수 없다. “더불어민주당 복당을 위한 노이즈 마케팅 아니냐”는 비아냥마저 나온다. 국정원은 항의에 그칠 게 아니라 고소 등 적극적 대응으로 박 전 원장의 잘못된 행동을 막을 필요가 있다. 과거에도 국정원장 재직 중 취득한 정보를 바탕으로 외국 언론에 기고를 연재했던 전직 원장이 “고소하겠다”는 국정원의 경고에 기고를 중단하고 사과한 전례가 있다.

역대 정권은 출범할 때마다 국정원의 개혁을 다짐했지만, 뒤로는 민간인 사찰을 계속한다는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전직 국정원장이 수감되기도 했다. 박 전 원장은 그런 흑역사를 바로잡아 투명하고 공정한 국정원을 만들라고 임명된 사람이었다. 공작정치의 희생자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라 정보기관의 행태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인사이기도 하다. 따라서 국정원장 재직 2년 동안 존안 자료를 폐기하거나, 그게 불가능하다면 철저히 봉인해 오남용을 막아야 했다. 그러기는커녕 퇴임 한 달도 안 돼 존안 자료의 존재를 무슨 대단한 흥밋거리인 양 언론에 흘리고 있으니 유감이다.

박 전 원장의 발언으로 국정원에는 지난 수십 년간 주요 인사들을 사찰한 자료가 여전히 남아 있어 박 전 원장 같은 사람이 얼마든지 들여다볼 수 있었던 정황이 확인됐다. 이러니 국정원이 아무리 “더는 사찰은 없다”고 해도 국민이 믿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국정원장과 군경 정보 수장들의 독대 보고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당연하고 바람직한 결정이나 그것만으론 부족하다. 국정원에 남아 있는 존안 자료도 완전히 폐기해야 한다. 누가 언제 이런 자료를 만들어 어떻게 이용했는지도 투명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