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도 고통도 다 지나간다, 노희경의 위로는 따뜻했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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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12일 종영한 tvN ‘우리들의 블루스’에는 이병헌, 차승원, 김우빈, 신민아, 이정은, 한지민, 엄정화를 비롯해 고두심, 김혜자까지 총출동해, 주연과 조연이 나뉘지 않은 채 각자의 이야기를 펼쳤다. 노 작가는 청소년, 장애인 등 소수자의 이야기를 통해 변화한 사회를 담아냈다. [사진 tvN]

12일 종영한 tvN ‘우리들의 블루스’에는 이병헌, 차승원, 김우빈, 신민아, 이정은, 한지민, 엄정화를 비롯해 고두심, 김혜자까지 총출동해, 주연과 조연이 나뉘지 않은 채 각자의 이야기를 펼쳤다. 노 작가는 청소년, 장애인 등 소수자의 이야기를 통해 변화한 사회를 담아냈다. [사진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노희경 극본, 김규태 연출, tvN)를 보며 새삼 노희경 작가의 나이를 찾아보게 됐다. 1966년생이니 몇 년 후면 환갑이다. 불륜을 소재로 이토록 섬세하고도 신선한 작품을 만들 수 있나 싶었던 ‘거짓말’(1998) 당시 30대 젊은 작가였는데, 이제 명실공히 역전의 노장이 됐다. ‘우리들의 블루스’는 나이에 어울리는 노희경의 길, 익숙하지만 새로운 길을 보여줬다.

새로움은 초반부터 시청자를 놀라게 했다. 이 어마어마한 배우들이 한꺼번에 출연한다고? 초반부가 이병헌이나 한지민이 아니라, 이정은(은희 역)과 차승원(한수 역)의 연애 이야기라고? 오스카 수상작 신스틸러이지만 늘 조연인 이정은을 웃음기와 액션까지 싹 뺀 차승원의 연애 상대로 붙인다고? 수십 년 켜켜이 쌓인 달달 씁쓸한 연애 이야기를 3회 만에 끝낸다고? 익숙하면서도 낯선 것들이 수두룩했다.

12일 종영한 tvN ‘우리들의 블루스’에는 이병헌, 차승원, 김우빈, 신민아, 이정은, 한지민, 엄정화를 비롯해 고두심, 김혜자까지 총출동해, 주연과 조연이 나뉘지 않은 채 각자의 이야기를 펼쳤다. 노 작가는 청소년, 장애인 등 소수자의 이야기를 통해 변화한 사회를 담아냈다. [사진 tvN]

12일 종영한 tvN ‘우리들의 블루스’에는 이병헌, 차승원, 김우빈, 신민아, 이정은, 한지민, 엄정화를 비롯해 고두심, 김혜자까지 총출동해, 주연과 조연이 나뉘지 않은 채 각자의 이야기를 펼쳤다. 노 작가는 청소년, 장애인 등 소수자의 이야기를 통해 변화한 사회를 담아냈다. [사진 tvN]

‘역시 노희경’이라 흡인력은 대단했지만, 이 드라마가 어떻게 흘러갈지 감이 잡힌 건 4회가 돼서였다. 각 인물의 사건을 삽화적으로 이어가면서도 미니시리즈의 통일성은 유지하는 구성 방식 말이다.

작가도 밝혔다시피 이는, 소수 주연 중심의 굵은 사건에 다수 조연과 단역이 배치되는 방식과 달리, 상당히 많은 인물이 주·조연 구분 없이 모두가 각자 인생의 주인공임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쟁쟁한 주연급 배우들을 한꺼번에 모을 수 있었던 것은 이 방식 덕분이다. 물론 미니시리즈에 삽화적 구성을 가미하는 방식은, 직업적으로 새로운 사건을 계속 처리하고 끝내야 하는 변호사, 수사관, 의사 등을 다룬 드라마에서 종종 쓰고 있긴 하다. 하지만 대개 이런 작품에서도 여전히 주연과 조연의 구분이 명확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노희경의 전작도 이런 과정을 거쳤다. TV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 이야기인 ‘그들이 사는 세상’(2008), 지구대 경찰 이야기를 다룬 ‘라이브’(2018)도 주인공 두어 명의 이야기를 중심에 두고 주변 인물을 꽤 비중 있게 다룬 작품들이다. 특히 ‘디어 마이 프렌즈’(2016)는 한국의 내로라 하는 노인 배우를 한꺼번에 출연시켰다는 점에서 ‘우리들의 블루스’에 가장 근접했다. 그러나 이조차 고현정·조인성의 연애 이야기를 초반부터 끝까지 고루 배분하는 방식이었다.

12일 종영한 tvN ‘우리들의 블루스’에는 이병헌, 차승원, 김우빈, 신민아, 이정은, 한지민, 엄정화를 비롯해 고두심, 김혜자까지 총출동해, 주연과 조연이 나뉘지 않은 채 각자의 이야기를 펼쳤다. 노 작가는 청소년, 장애인 등 소수자의 이야기를 통해 변화한 사회를 담아냈다. [사진 tvN]

12일 종영한 tvN ‘우리들의 블루스’에는 이병헌, 차승원, 김우빈, 신민아, 이정은, 한지민, 엄정화를 비롯해 고두심, 김혜자까지 총출동해, 주연과 조연이 나뉘지 않은 채 각자의 이야기를 펼쳤다. 노 작가는 청소년, 장애인 등 소수자의 이야기를 통해 변화한 사회를 담아냈다. [사진 tvN]

꽤 현명한 선택이다. 누구나 자기 삶의 주인공이라는 의미도 중요하거니와, 무엇보다도 노희경 같은 노장이 잘 다룰 만한 방식이기 때문이다. 연애든 부모의 죽음이든 애증의 가족 관계든, 어떤 갈등 하나가 인생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과정에 몰입하던 젊은 시절은 이제 지나갔다. 환갑을 눈앞에 둔 나이가 되면, 뜨겁고 고통스러운 사랑이나, 우정이 꼬여버린 친구 관계는 물론, 어떤 심각한 일도 시간이 흐르면 일상에 묻혀 지나가는 것임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그것이 심지어 죽음일지라도 말이다.

‘우리들의 블루스’ 속 사건 하나하나가 (‘노희경 월드’의 갈등이 대개 그러하듯) 징그럽게 심각한 것임에도 2~3회 만에 마무리되는 것은, 작가의 태도가 젊은 시절과는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노희경답게 핵심을 찌르고, 깊고 섬세하게 그려내면서도, 그 갖가지 고통에도 불구하고 삶은 여전히 굴러간다고 느끼게 한다. ‘암 걸린 게 복’이라는 춘희 삼촌(고두심 분) 말에 시청자가 진정으로 공감하게 만드는 능력은, 천하의 노희경도 젊을 땐 가지지 못했다.

주목할 만한 또 하나의 선택이 있다. 이렇게 나이 든 시선이 자칫 치열한 세상과의 긴장감을 잃어버리게 만들 수 있는데, 이를 여전히 유지하게 하는 묘수를 놓치지 않았다. 바로 이 시대의 첨예한 사회적 이슈를 회피하지 않고 비중 있게 다루어내는 방식이다. 장애인 배우의 출연, 고교생 임신 소재 등은 여태껏 TV 드라마가 피했던 게 관행이다.

이미 많은 매체가 주목했듯 이 작품은 장애인 문제를 정면에서 다룰 뿐 아니라 장애인 배우 2명을 비중 있는 역할에 배치했다. ‘스토브리그’(이신화 극본, 정동윤 연출, SBS, 2019)에서 비장애인이어도 무방한 역할을 지체장애인으로 설정함으로써, 장애를 머리카락 색깔처럼 다양성의 하나로 자연스레 배치한 시도가 꽤 신선했다. ‘우리들의 블루스’에서는 아예 장애인 역을 장애인 배우에게 맡겼다. 순리에 맞지만, 파격적인 선택임이 분명하다.

고교생 혼전임신과 출산을 어둡고 칙칙하지 않게, 청소년과 학생의 인권의 문제까지 생각하도록 다뤄낸 것 역시 유례가 없다. (정성주 작가의 ‘풍문으로 들었소’도 청소년 출산을 칙칙하지 않게 다뤘지만, 출산한 여고생은 대학 진학을 못 한다) 마치 노년의 김수현 작가가 ‘김수현 월드’의 익숙한 가족극 안에, 성소수자, 주부 안식년, 가정폭력, 미혼모 등 사회적 이슈를 배치해, 자칫 느슨해지려는 시청자를 긴장시키고 관심을 환기했던 방식을 벤치마킹한 듯하다.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이 방식들을 노희경은 능란하게 요리하는 데에 성공했다. 역시 ‘노희경이 노희경 했다’ 싶다.

이영미 대중예술평론가

이영미 대중예술평론가

이영미 대중예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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