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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플레이션’에 러 무역흑자 2배…푸틴 이걸 노렸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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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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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모스크바는 전쟁 중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전쟁 전과 다름없는 일상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오선근 재러한국경제인협회 사무국장이 전해 온 러시아 모스크바의 상황이다. 그는 “해외여행을 못 가는 불편이 있지만, 아직까지 수입품 재고가 있는지 품귀나 사재기 현상은 없다”며 “물가가 많이 올랐지만, 생필품의 경우 정부가 통제하고 있어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발발한 전쟁이 110일째를 맞고 있다. ‘푸틴플레이션(푸틴+인플레이션)’이 전 세계를 흔들고 있지만, 러시아는 역대급 무역 흑자를 기록하며 겉으로는 꿋꿋하게 버티는 모습이다. 그러나 국제 제재 여파로 올해 경제가 지난해보다 15%가량 위축될 전망이고, 외국 기업들의 철수와 반도체 등 핵심 부품의 수출 금지, 인재 유출 등으로 러시아 경제의 앞날이 밝지 않다.

세계 10대 원유 생산국.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세계 10대 원유 생산국.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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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에너지·청정대기연구센터(CREA)가 지난 12일(현지시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100일(2월 24일~6월 3일)간 원유와 가스·석탄 등 화석연료 수출로 930억 유로(약 125조원)를 벌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는 에너지 수출로 하루 평균 9억3000만 유로(약 1조2500억원)를 벌어, 하루 전쟁 비용으로 추정되는 8억4000만 유로(약 1조1300억원)를 충당하고도 남았다. 국제금융협회(IIF)는 국제 에너지 가격 급등에 힘입어 올해 러시아의 무역 흑자는 2500억 달러(약 321조)로 지난해(1200억 달러)의 배를 넘을 것으로 예상했다.

유럽연합(EU)이 지난달 말 러시아산 원유 금수 조치에 나섰지만, 영향은 크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최진영 이베스트투자증권 연구원은 “원유 수요 2·3위인 중국·인도가 석유수출국기구(OPEC)보다 싼 러시아산 원유를 수입하면서 러시아 원유 수출이 최근 급증하고 있다”며 “인도의 러시아 원유 수입량은 3만8000배럴에서 85만 배럴로 늘었다”고 말했다.

“푸틴, 개도국 굶겨 기아정치 준비”

싼 러시아 원유에 눈독을 들이는 곳은 중국과 인도만이 아니다. 심각한 경제위기에 처한 스리랑카도 러시아산 석유와 천연가스를 더 사야 할지 모른다고 12일 밝혔다. 스리랑카는 2주 전 러시아산 천연가스 9만9000t을 구매했다.

에너지뿐만 아니라 밀도 러시아의 든든한 무기다. 러시아는 전 세계 1위 밀 수출국이다. 전쟁터가 된 우크라이나는 세계 5위 밀 수출국이다. 두 나라는 전 세계 밀 수출의 30%를 차지한다.

세계 밀 수출 순위.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세계 밀 수출 순위.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동유럽 역사학자 티모시스나이더 예일대 교수는 지난 11일 트위터에 “러시아는 ‘기아 계획’을 갖고 있다”며 “푸틴은 유럽과 다음 전쟁 준비의 일환으로 개발도상국 상당수를 굶길 준비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식량 부족 사태로 북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에 숱한 난민을 발생시켜 유럽을 불안정화하는 ‘기아 정치’ 가능성을 지적한 것이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도 지난달 24일 스위스에서 열린 다보스포럼에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지역의 농기계 등을 빼앗고 흑해 수출항을 봉쇄하고 있다”며 “러시아가 에너지와 마찬가지로 식량 공급을 무기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코로나19로 인한 세계 공급망 차질과 미·중 전략경쟁에 이은 우크라이나 전쟁은 에너지·식량 가격을 급등시켜 전 세계에서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유발하고 있다. 김영우 SK증권 리서치센터장은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도 (푸틴플레이션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투자자들 사이에서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프랑스 월간 르몽드디플로마티크 6월호는 ‘에너지 전쟁, 최종 승자는 누구인가’란 기사에서 “러시아 제재는 결국 유럽을 압박할 것”이라며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도 ‘유럽이 러시아 석유에 금수 조치를 내려도 러시아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극히 미미할 것’이라고 인정했다”고 보도했다.

난방 시작되는 가을이 터닝포인트?

시간이 푸틴의 편이라는 시각도 있다. 러시아 고위 관료는 워싱턴포스트에 “우리 모두 가을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유럽에서 난방이 본격화되는 가을이 되면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유럽 국가들이 에너지 위기를 버티지 못할 것이란 기대가 깔렸다.

그러나 러시아 경제 상황이 낙관적인 것은 아니다. 국제금융협회(IIF)는 지난 8일 보고서에서 러시아 경제성장률이 올해 마이너스 15%를 기록하고, 내년에는 마이너스 3%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또 대러 제재로 인해 러시아는 반도체 등 핵심 부품을 수입할 수 없어 산업 장비와 자동차, 가전제품 등의 생산에 차질이 예상된다. 맥도날드·스타벅스 등 외국 기업들과 공학자 등 지식인들의 러시아 탈출은 러시아 경제의 성장 기반을 허물 수 있다. 엘리나 리바코바 IIF 이코노미스트는 “에너지 가격 급등에 따른 큰 폭의 무역 흑자와 루블화 가치 안정이 러시아 경제가 예상보다 굳건히 버티고 있다는 증거로 판단해선 안 된다”며 “미국과 유럽연합(EU) 등의 대러 제재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러시아 경제를 옥죌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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