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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중 맞아? '푸틴플레이션' 폭탄 던진 러시아의 반전 풍경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현재 모스크바는 전쟁 중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전쟁 전과 같은 일상이 유지되고 있다.”

13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중심부의 옛 맥도날드 매장에 새로이 개장한 패스트푸드 음식점 '브쿠스노 이 토치카' 앞에 사람들이 줄 서 있다. '브쿠스노 이 토치카'는 미국의 맥도날드가 러시아에서 철수한 후 모스크바 등지에 15개 매장을 열었다.〈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13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 중심부의 옛 맥도날드 매장에 새로이 개장한 패스트푸드 음식점 '브쿠스노 이 토치카' 앞에 사람들이 줄 서 있다. '브쿠스노 이 토치카'는 미국의 맥도날드가 러시아에서 철수한 후 모스크바 등지에 15개 매장을 열었다.〈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오선근 재러한국경제인협회 사무국장이 전해온 러시아 모스크바의 상황이다. 그는 “해외여행을 못 가는 불편함 정도만 있을 뿐, 아직까지 수입품 재고가 있는지 품귀나 사재기 현상은 없다"며 "물가가 많이 올랐지만, 생필품의 경우 정부가 제대로 통제하고 있어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발발한 전쟁이 110일째를 맞고 있다. '푸틴플레이션(푸틴+인플레이션)'이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지만, 인플레이션을 전 세계로 수출한 러시아는 역대급 무역흑자를 기록하며 꿋꿋하게 버티는 모습이다.

미국 등 서구 국가의 각종 경제 제제로 러시아 경제는 충격을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 최근 세계은행은 러시아의 올해 경제성장률이 당초 예상보다 11.3%포인트 더 떨어진 8.9% 역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이처럼 암울한 전망에도 러시아 경제는 전쟁 이전의 모습을 회복해가는 모양새다.

전쟁 전과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브쿠스노 이 토치카(맛있고 그게 다야)'란 이름으로 재개장한 맥도날드다. 지난 3월 러시아에서 철수를 발표한 뒤 폐쇄됐던 맥도날드 매장들이 현지 브랜드로 이름을 바꿔 달고 지난 12일(현지시간) 재개장했다.

기존 맥도날드의 일부 메뉴가 빠지고 맛이 다르다는 논란도 일지만, 재개장 직후부터 매장에 긴 줄이 늘어서며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 사무국장은 "KFC와 버거킹도 그대로 운영 중이고 전쟁 이후 일상에서 달라진 건 스타벅스가 사라졌다는 것 정도"라고 말했다.

전쟁 전으로 돌아간 러시아 기준금리와 루블화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러시아 금융 시장도 일단은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러시아 중앙은행은 지난 10일(현지시각) 기준금리를 연 11%에서 9.5%로 1.5%포인트 인하했다. 지난달 26일 3%포인트 낮춘 뒤 2주 만에 추가 인하했다. 이로써 러시아의 기준금리는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됐다. 최근 루블화가 강세로 돌아선 덕이다.

자유 낙하했던 루블화도 낙폭을 회복했다. 13일 오후 4시(한국시간) 루블화 가치는 달러당 56루블에 거래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직후 달러당 140루블까지 떨어졌던 루블화 가치가 전쟁 직전 수준까지 되돌아 왔다.

러시아 전쟁 동안 에너지 수출로 125조원 벌어  

루블화 가치가 안정을 찾은 배경에는 러시아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에너지’가 있다. 에너지 대금을 루블화로만 받는 데다, 치솟는 유가에 러시아가 엄청난 무역 흑자를 기록하면서다. 러시아는 세계 1위의 천연가스, 세계 3위의 원유 생산국이다. 최근 수요 급증과 공급 부족 속 국제 유가는 배럴당 120달러를 넘어섰다.

핀란드의 '에너지·청정대기연구센터'(CREA)가 12일(현지시간)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100일(2월 24일~6월 3일)간 원유와 가스·석탄 등 화석연료 수출로 930억 유로(약 125조원)를 벌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는 에너지 수출로 하루 평균 9억3000만 유로(약 1조2500억원)를 벌어, 일일 전쟁비용으로 추정되는 8억4000만 유로(약 1조1300억원)를 충당하고도 남았다. 국제금융협회(IIF)는 에너지 수출 호조로 올해 러시아의 무역 흑자(2500억 달러·약 321조)가 지난해(1200억 달러)의 배를 넘을 것으로 예상했다.

컨설팅업체인 판테온 거시경제연구소의 클라우스 비스테센은 “대러시아 제재가 오히려 무역 흑자를 늘려 전쟁 비용 충당에 도움이 됐다”고 지적했다.

유럽연합(EU)이 지난달 말 뒤늦게 러시아산 원유 금수조치에 나섰지만 영향은 미미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최진영 이베스트투자증권 연구원은 "원유 수요 2·3위인 중국과 인도가 석유수출국기구(OPEC)보다 싼 러시아산 원유을 수입하면서 러시아 원유 수출이 최근 급증하고 있다"며 "인도의 러시아 원유 수입량은 3만8000배럴에서 85만 배럴로 늘었다"고 말했다.

싼 러시아 원유에 눈독을 들이는 곳은 중국과 인도만이 아니다. 심각한 경제 위기에 처한 스리랑카도 러시아산 석유와 천연가스를 더 사야 할지 모른다고 12일(현지시간) 밝혔다. 스리랑카는 2주 전 러시아산 천연가스 9만9000t을 구매했다.

'기아정치'...에너지 이어 식량 무기화 할 수도

에너지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믿을 구석은 '식량;이다. 러시아는 전 세계 1위의 밀 수출국이다. 전쟁터가 된 우크라이나는 세계 5위의 밀 수출국이다. 두 나라에서 전 세계 30% 밀이 생산된다.

동유럽 역사 전문가인 티모시 스나이더 예일대 교수는 지난 11일 자신의 트위터에 "러시아는 '기아 계획'을 갖고 있다"며 "푸틴은 유럽과 다음 전쟁 준비의 일환으로 개발도상국 상당수를 굶길 준비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식량 부족 사태로 북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에 숱한 난민을 발생시켜 유럽을 불안정화하는 ‘기아 정치’ 가능성을 지적한 것이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도 지난달 24일 스위스에서 열린 다보스포럼에서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 지역의 농기계 등을 빼앗고 흑해 수출항을 봉쇄하고 있다"며 "러시아가 에너지와 마찬가지로 식량 공급을 '무기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시간은 러시아편? "푸틴은 가을 기다린다"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그래픽=김영옥 기자 yesok@joongang.co.kr

전쟁의 피해는 러시아를 뺀 지구촌으로 번져가고 있다. 에너지와 식량 가격이 급등하며 전 세계의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압력이 커지고 있다. 유럽중앙은행(ECB)이 가파른 금리 인상을 예고하자 이탈리아와 그리스, 스페인 등 채무가 많은 유로존 국가의 경제는 흔들리고 있다.

김영우 SK증권 리서치센터 센터장은 “결국 전 세계 경제를 뒤흔들고 있는 것은 푸틴이 만들어낸 인플레이션”이라며 “연방준비제도(Fed)도 (푸틴플레이션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가 투자자들 사이에서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대러시아 경제 제재 실패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프랑스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6월호는 ‘에너지 전쟁, 최종 승자는 누구인가’란 기사에서 “러시아 제재는 결국 유럽을 압박할 것”이라며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도 ‘유럽이 러시아 석유에 금수 조치를 내려도 러시아에 미치는 부정적인 영향은 극히 미미할 것’이라고 인정했다”고 보도했다.

영국 가디언의 래리 엘리엇 경제 에디터는 '러시아는 경제 전쟁에서 이기고 있고, 푸틴은 군대를 철수할 생각이 없다'는 제목의 칼럼에서 서방의 경제제재가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시간은 푸틴의 편이라는 시각도 있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러시아 고위 관료는 “우리 모두 가을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를 지원하는 서구 국가가 에너지 위기를 버티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러시아가 장기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난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가을이 되면 경제 전쟁에서 승기를 푸틴이 쥘 것이란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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