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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하현옥의 시시각각

정부의 오락가락 ‘공시가격 사용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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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하현옥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하현옥 금융팀장

하현옥 금융팀장

‘공시가격 과속스캔들’에 제동이 걸렸다. 정부가 ‘공시가격 현실화 계획’을 전면 재검토해 오는 11월 수정안을 발표하기로 했다. 수술대에 오르는 건 문재인 정부 때인 2020년 11월 발표한 계획이다. 공시가격을 2030년까지 단계적으로 시세의 90%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정권이 바뀐 영향이라 해도, 1년6개월 만의 사실상 백기 투항이다.

공시가 현실화로 세금 부담 커지자 #올해 보유세에 지난해 공시가 적용 #‘공시가 증세’ 막으려 수정안 검토 #

공시가격 현실화는 도입 취지로만 따지면 의미가 있다. 공시가격이 실제 시세보다 너무 낮은 탓에 조세 정의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나온 만큼 공시지가를 시세에 맞춰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맞는 말이다. 문제는 근본 취지와 달리 이 카드를 정의롭지 않게, 집값 잡기와 다주택·고가 주택자를 겨냥한 징벌적 수단으로 끌어들인 탓에 각종 부작용과 코미디 같은 상황이 벌어진 데 있다.

가장 최근의 사례는 지난달 30일 정부가 올해 1세대 1주택자의 부동산 보유세(재산세와 종합부동산세) 과세표준(과표)인 공시가격을 2021년 기준으로 적용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공시가격 상승으로 늘어난 보유세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조치다. 보유세 부담을 2020년 수준으로 환원하기 위해 정부는 종부세 산정 시 적용하는 공정시장가액비율(현재 100%)도 낮추겠다고 했다.

올해 세금을 매기는 데 지난해 기준을 가져다 쓰겠다는 이 ‘참신한’ 발상은 공시가격 과속스캔들에 기인한다. 부동산 가격 급등 속에 공시가격을 시세에 맞춰 올리다 보니 공시가격 상승 폭은 그야말로 아찔한 수준이다. 공동주택 기준 2021년 공시가격은 19.05%, 올해는 17.2%가량 뛰었다. 고가 주택의 현실화 속도는 더 빠르다. 곳곳에서 ‘세금 폭탄’이 터진 이유다.

정부가 올해 1세대 1주택자의 보유세를 산정할 때 지난해 공시가격을 적용해 세금을 매기기로 했다. 사진은 지난 3월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전망대 서울스카이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아파트의 모습. 연합뉴스

정부가 올해 1세대 1주택자의 보유세를 산정할 때 지난해 공시가격을 적용해 세금을 매기기로 했다. 사진은 지난 3월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전망대 서울스카이에서 바라본 서울 시내 아파트의 모습. 연합뉴스

‘공시가 증세’ 논란도 빚어졌다. 공시가격은 보유세뿐만 아니라 건강보험료와 기초연금, 개발부담금, 재건축 초과이익 환수제 등 67개 행정 제도의 기준으로 사용되고 있다. 공시가격이 오르며 세금뿐만 아니라 건강보험료 부담이 늘어나고, 복지 수급자에서 탈락하는 등 각종 부작용이 속출했다. 공시가격 과속이 야기할 문제보다 ‘부동산 때려잡기’에 맹목적으로 나선 후폭풍인 셈이다.

사실 공시가격은 그동안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투명성과 신뢰성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공시가격 산정 방식 등에 대한 내용을 제대로 공개하지 않다 보니, ‘고무줄 가격’ 혹은 ‘깜깜이 가격’이라는 꼬리표가 달렸다. 2019년 4월 서울 성수동 갤러리아 포레의 2개 동 230가구의 공시가격이 모두 정정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층과 방향에 따른 가격 차이가 반영되지 않은 탓이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공시가격에 대한 불신을 키운 건 그동안 정부가 보여온 ‘공시가격 사용 방식’이다. 세율이나 공정시장가액비율 등 정책 수단을 쓰지 않고 공시가격을 인위적으로 조정해 증세나 감세의 만능키로 남용한 측면이 강했다. “시세가 올랐는데 (혹은 내렸는데)”라며 시장 가격이라는 방패를 앞세워 비판을 피해 간 것으로 오해하기 딱이다.

특히 다시 수술대에 오른 ‘공시가격 현실화’는 부동산 가격이 뛸 때마다 정부가 들고나온 카드였다. 부동산값이 오르면 현실화에 목소리를 높이다가 가격이 내리면 슬그머니 사라지다 보니, 공정성과 당위성은 온데간데없고 ‘공시가격 현실화=증세’라는 단순 도식이 자리 잡게 된 모양새다. 오락가락 공시가격에 조세의 기본 원칙인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도 사라졌다.

“이번 공시가격 현실화의 방향은 다르다”고 강변할 수도, “세금 깎아주겠다는데 뭐가 불만이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너그러운 마음이든 박한 마음이든, 정부의 변심에 따라 공시가격이 원칙 없는 갈지자 행보를 하는 건 곤란하다. 시간이 걸려도 당장 가시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더라도, 이번 수술은 제대로 했으면 한다. 성형이든, 정책이든 칼을 댈수록 나빠지기 마련이라서다.